그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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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
  • 오희숙 수필가
  • 승인 2020.06.11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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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희숙 수필가
오희숙 수필가

 

참으로 오래전 일이다. 정확히 말하면 68년 전의 일이다. 티브이에서 바짝 마른 뼈만 앙상한 아프리카 아이를 보면서 불현듯 그 아이가 생각이 났다.


6·25가 지난 해 할머니는 삼대독자 아들 자식없어 걱정 하더니 아이가 딸린 여자를 데려왔다.

그 아이는 돌이 지난 사내아이였다. 나는 그 여자를 작은 어머니라 불렀다. 아이는 얼마나 말랐는지 살은 하나도 없고 가죽만 남았다. 아이 보는 것은 내 차지였다. 그날도 해가 지도록 아이를 업고 놀았다. 밥 먹으라고 부르는 엄마의 소리 듣고 아이를 작은 엄마에게 내려주고 안방으로 갔다. 밥을 다 먹어도 작은 엄마는 들어오지 않았다. 할머니는 “작은엄마 밥 먹으라고 해라.”

“작은엄마 밥 먹으래요.” 하고 방문을 여니 울고 있었다. 할머니 작은엄마 울고 있어요. 식구들이 가보니 아이가 죽었다고 했다. 그때는 몰랐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아이가 내 등에서 죽은 것은 아니었나 싶다. 뛰어노는 재미에 아이 죽은 것도 몰랐던 건 아닌가 싶었다. 아이 밥이라도 먹이려고 아이 낳아주려고 들어왔다가 아이가 죽어 바로 떠났다. 에미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생각하니 왜 이리 죄책감이 드는지 모르겠다. 아이 안고 울던 여자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우리 할머니는 오직 손주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삼대독자 외아들에 딸을 여덟을 낳았으니 얼마나 애가 달았을까 싶다. 죽어 조상님을 어떻게 보느냐는 것이다. 어디서 정성들여 아들을 낳았다는 소문을 들으면 어디든 가서 정성을 들였다 서해안 어느 섬까지 다녔다. 지금 같이 교통도 안 좋은데 걸어 걸어 며칠이라도 다녔다.


어느 날 할머니는 군서 은행리 박수에게 백일기도를 아버지 몰래 시작했다. 어머니가 일을 하셨기에 할머니가 집안일을 다하셨다. 군서를 가려면 저녁을 해놓고 밥 한술 떠 먹고는 이 십리 길을 걸어가 밤새 불공을 드리고 새벽에 오셨다. 말이 그렇지 계속 빠지지 않고 백일을 드린 정성은 대단했다. 백일이 끝나니 손주 받아 가라고 했다. 생긴 것은 부모 닮았겠지만 빌어 난 자식은 표를 붙여 내보낸단다. 제 눈에 보이지 않은 곳에 붓 꼭지로 찍은 까만 점이 있다고 했다. 열 달 후에 정말 이목구비가 또렷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항문 옆 엉덩이에 붓 꼭지로 찍은 까만 점이 있었다. 손주한테는 지극 정성을 다했다. 끼마다 작은 뚝배기에 각가지 죽을 쑤어 이유식을 해주었고 몸에 좋다는 것은 다 해 주었다. 우리는 동생 주는 것 먹고 싶어 죽을 뻔 했다. 우리는 맛도 못 보고 오직 손주뿐이다.


요즈음 아들 값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을 쳤는데 그때만 해도 최상급이었다. 요즘은 독자 아들이 딸만 낳아도 아들 낳으라고 시어머니들 말도 못 한다. 아이를 아예 안 낳은 부부도 많다. 식물도 옮기면 번식만 한다. 종족보존을 위해서다. 자연의 순리대로 사는 것이다. 우리 젊었을 때는 둘만 낳아 잘 기르자였다. 조금 더 나가서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부럽지 않다.”로 가족계획을 했는데 지금은 정부에서 낳아 키우게끔 환경을 해달란다. 어떤 것이 맞는지 난 모르겠다.


저 세상가신 우리 할머니 조상님 만나 잘했다고 칭찬은 들으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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