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별빛이 쏟아지는 벌판으로(2)
상태바
가자, 별빛이 쏟아지는 벌판으로(2)
  • 김수연 기자
  • 승인 2020.10.29 15: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딱히 죽을 생각은 없었지만 유서를 쓰려고 펜을 들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사람 일인데 긴 여행을 시작하며 하나쯤 가지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릴적부터 ‘끝’이라는 단어가 너무 좋았다. 더 이상 나에게 주어진 의무도, 책임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참으로 달콤한 단어다. 겁이 많은 나에게 끝은 더 이상 겁낼 것이 없음을 의미했다. 이제 나는 ‘끝’이라는 단어에서 의문을 느끼고 있다. 과연 이 길의 끝은 어디일까? 나는 그 끝을 만날 수 있을까?


어떻게 보면 죽음도 결국 끝이다. 만약 내 삶이 길 위에서 끝난다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괜찮을 것 같다. 그러니 그냥 내 몸을 한국으로 데려가지 말고 화장해서 피니스테라(세상의 끝)에 뿌려주면 좋겠다」


그녀는 유서를 고이 접어 가방의 한쪽 주머니에 넣었다. 그녀는 늦게 잠에 빠졌다. 너무나도 오랜만에 느껴본 해방감과 설렘이 그녀의 휴식을 방해했다. 자정이 넘어 잠에 빠졌던 그녀는 다음날 새벽 4시에 일어났다. 평소 같았으면 핸드폰을 보고 슬며시 욕설을 읊조리며 다시 잠에 빠졌겠지만 이상하리만큼 몸도 마음도 모두 가뿐했다.


그녀는 조용히 전날 밤 미리 싸두었던 가방을 짊어지고 길을 나섰다. 태어나서 처음 본 동화 같은 마을에 내려 앉은 어둠이 가시지 않았을 때였다. 왜인지 무섭지 않았다. 드문 드문 세워진 가로등들을 지나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마을을 떠났다. 어둠과 별빛만이 그녀를 반겼다. 항상 ‘끝’이라는 단어에서 달콤함을 느꼈던 그녀는 처음으로 ‘시작’이라는 단어에서 달콤함을 느꼈다. 3월 23일이었다.


설렘과 달콤함에 취해 거리낌 없이 홀로 마을을 떠났던 그녀는 곧 첫 난관을 만났다. 자신을 향해 곧 물어뜯기라도 할 듯 맹렬히 짖는 커다란 개였다. 어둠 속에서 개의 눈만이 빛나고 있었다. 궁여지책으로 켠 작은 손전등은 오히려 개를 자극했는지 개는 더욱 맹렬히 짖어댔다. 주위를 둘러봤다. 민가도, 지나다니는 차도, 자신을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개를 피해 우회할 길도 없었다. 그녀에게 보이는 길은 개가 막고 서있는 걸어가야 할 길과 자신이 걸어왔던 길 뿐이었다. 이내 두려워졌다. 그녀는 무언가가 두려워지면 늘 회피해왔다.


하지만 지금 서있는 길에 ‘회피’라는 선택지는 없었다. 되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넌 안 될 거라고 했잖아, 돈 낭비나 하고 이게 뭐니?’라고 말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항상 그녀 앞을 막고 있던 상처에 대한 두려움이 되살아났다. 서러워졌다.
정말로 가고 싶어했지만 주변의 비난이 두려워 피했던 수 많은 길들이 생각났다. 문득 눈물이 났다. 여러 해 동안 응어리진 설움을 토해내려는 듯 울부짖었다. 자신을 향해 짖는 개를 따라 짖기도 했다. 발도 굴렀다.


그녀는 어느새 개가 아닌, 남들의 비난을 피해 정작 자신이 가고 싶어 했던 길을 포기했던 과거의 자신을 향해 울부짖고 발을 구르고 있었다.
정신을 차렸다. 개는 온데간데 없고 그녀 홀로 덩그러이 남아있었다. 나아 갈 수 있다는 기쁨 때문인지 혼자 울며 발을 구르던 자신의 모습 때문인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해도 뜨지 않은 새벽에 이국의 피레네 산맥이 떠나가라 웃어 재꼈다. 홀가분했다.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