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군의회 제3대 의원을 지낸 민종규(75) 전 의원.
민 전 의원이 다른 의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일단 실행하기로 계획된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결과를 봐야만 직성이 풀리는, 어찌보면 다소 완벽주의적인 성격의 소유자다. 그래서 그의 삶의 궤적 또한 늘 모험과 투쟁(?)의 연속이었다. 그래서인지 옥천군청 공무원들도 그에게 받은 질문에는 옴짝달싹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당시 군수도 “민 의원이 군의회에 들어오고부터 공직사회가 얼어 붙었다”고 말할 정도였을까. 그만큼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고 매사에 철두철미했다는 증거다.
사실 그는 군의원에 도전할 생각이 없었다. 늘 하던대로 자신이 만든 농촌문제연구소만 잘 운영하며 살아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농민의 입장을 대변하고 농민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분주한 발품을 팔았을 뿐 대놓고 ‘내가 농민의 대표자가 되어 보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심없는 행동에 주민들이 의회로 몰아
하지만, 평소 마을의 발전과 농민의 편에서 사심없이 행동하는 그를 유심히 지켜 본 주민들이 그를 의회로 내몰았다. “당신 말고 누가 우리같은 농민들을 위해 일할 수 있느냐”고.
그래서 3대 옥천군의회의 문을 두드렸다. 당연히 당선됐다. 어찌보면 지난 세월 군의원이 되기 전부터 운영해 오던 농촌문제연구소가 그에게 많은 힘이 됐는지도 모른다.
농촌문제연구소를 운영하던 시절 민 전 의원은 생애 가장 큰 보람을 느꼈다. 다름 아닌 독일 정부가 민 전 의원을 국빈자격으로 정식 초청장을 보냈기 때문.
독일 정부에서 모든 비용을 댈테니 제발 독일로 와서 영농조합에 대해 설명을 좀 해 달라고 애걸한 것이다. 설마 아니 했는데 실제로 초청장이 왔을 때 민 전 의원은 조금 당황했다. ‘역시 강대국 독일이 맞긴 맞구나’ 했다.
그런 여파 때문이었는지 민 전 의원은 1992년 ‘제2회 옥천군민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환경부 국장 직접 옥천으로 내려오도록 해
의회에 들어선 민 전 의원은 다양한 일들을 처리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대청댐 관련 보상문제다. 당시 민 전 의원은 대청댐 상류지역 주민들이 입은 피해보상을 위해 ‘대청댐 상류지역 피해보상에 관한 특별대책위원회’를 만들고 위원장을 맡아 보상을 받도록 했다. 더욱이 민 전 의원은 정부가 대청댐에 대해 규제만 할게 아니라 피해 주민들이 소외감을 갖지 않도록 해 달라고 환경부 정책전략국장을 직접 옥천으로 내려 오게 해 주민들에게 지원을 하겠다는 약속을 하게 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당시 지역 국회의원을 지내던 박준병 씨와 긴 대화 끝에 ‘농어촌발전특별조치법’이 국회를 통과하도록 하기도 했다. 11월 11일 ‘농민의 날’도 민 전 의원이 이뤄낸 작품 가운데 하나다.
이 외에도 국민건강검진 사전검사(암) 토대 확립과 수로건설, 보건소 기능 강화 등 비록 임기 내에 완결을 보진 못했지만 훗날 모두 열매를 맺어 한편으로 뿌듯함을 느낀다고 했다.
하지만, 의원 활동 시 신경을 건드리는 부분도 없지 않았다. 지역발전을 위해 나름대로 발품을 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단체들의 테클이 심했다. 건전한 비판보다는 ‘비판을 위한 비판’ 즉 비난에 가까운 행태를 보여 간헐적으로 마찰을 빗기도 했다.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려면 동시에 대안도 제시를 해야 하는데 무조건적인 비판에 많은 심적 고통을 겪기도 했다.
자연인으로 돌아가는 날 손가락질 받아선 안돼
“지방의회? 당연히 존속해야죠. 하지만 지금과 같이 국민의 세금을 받는 상황에서는 많은 것이 달라져야 한다고 봅니다. 심심하면 ‘지방의회 무용론’이 나오는 이유도 의회 의원들이 제 할 일을 다하지 않고 다른 곳에 신경을 쓰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의원은 주민을 대신해 일을 하라고 뽑아 준 사람들 아니겠어요? 그렇다면 임기를 마치고 자연인으로 돌아가는 날 주민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일은 없어야겠지요”
민 전 의원은 현재 고향 안남면에서 아로니아 농사에 푹 빠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