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기록 ‘경주 황룡사 9층목탑 금동찰주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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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기록 ‘경주 황룡사 9층목탑 금동찰주본기’
  • 김수연기자
  • 승인 2021.01.14 14: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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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문화유산

경주 황룡사 9층목탑 금동찰주본기(이하 금동찰주본기)는 통일신라시대 871년부터 872년까지 진행된 황룡사 9층목탑 중수과정을 정리해 금으로 도금한 동판에 새긴 기록물로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중이며 보물 제 1980호로 지정된 유물이다.

이 동판에는 황룡사 찰주본기(皇龍寺 刹柱本記)라는 문구와 박거물(朴居勿)의 이름을 새겼고 황룡사 9층 목탑이 조성된 배경을 설명했다.

이에 더해 탑이 완성된 뒤 90여년이 지나 기울어지자 871년에 중수를 추진한 배경을 밝혔다.

또한 중수과정과 찰주본기를 만든 목적을 밝히고 중수에 참여한 관리들과 승려들, 황룡사, 감은사의 승려들을 나열한 후 마지막으로 이 동판에 글을 새긴 이들을 언급했다.

동판에 기록된 인원은 관리 12명 승려 16명을 포함한 56명이다.

금동찰주본기는 황룡사 9층목탑의 중수 과정을 후대의 역사서가 아닌 중수 당시에 기록한 실물자료로 황룡사 9층 목탑 건립과 관련해 후대의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기록서와 비교 검토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

황룡사 9층 목탑은 선덕여왕 대인 645년, 당시 신라와 신라 불교계에 있어 가장 크고 중요한 절이었던 황룡사 부지 내에 건립된 목탑이다.

황룡사 담장 안의 면적은 80,928㎡로 현재 불국사의 8배 정도 된다.

또한 황룡사 9층 목탑은 당시 신라를 중심으로 외적의 침입을 막고 삼국을 통일하고자 하는 그 시대의 간절한 소원이 표현된 것이라고 보는 학자가 많은데 이런 소원과 포부가 이 탑에 반영돼 80m 보다 높게 지어졌을 것이라 추정한다.

당시 탑 1층부터 일본, 중화, 남중국, 탐라, 백제, 말갈, 거란, 여진, 고구려의 침략을 막는다는 의미가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목탑 중건 이후 754년엔 구리 약 50만근을 들여 만든,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큰 황룡사 대종을 종루에 달았다. 현존하는 전통종 중 가장 큰 성덕대왕신종이 구리 12만근이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황룡사 대종은 성덕대왕신종의 4배가 넘는 크기다.

황룡사 9층 목탑은 건립 후 수많은 중건을 거쳤다. 금동찰주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9세기 중엽을 기준으로 큰 보수공사가 이뤄진것만 5번, 이후 한번 소실돼 다시 재건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황룡사 9층 목탑은 최종 보수공사가 끝난 지 142년 후 고려 시대인 1238년 몽골의 3차 침입으로 전소됐고 그 후에 다시 재건되지 못했다.

한편 황룡사는 솔거가 실제 같은 소나무 그림을 그려 새들이 날아와 부딪혀 죽은 장소이기도 하며 자장이 보살계본을 원효가 금강삼매경론을 강설한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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