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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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
  • 지옥임 수필가
  • 승인 2021.01.21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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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늦기 전에 꼭 한번 눈길을 걸어보고 싶었다. 지난밤 내린 하얀 눈이 시끄럽고 더러운 세상을 다 덮어버렸다. 깨끗한 세상에 매료되어 앞뒤 생각도 하지 않고 집을 나섰다. 발걸음 한 발짝 한 발짝이 조심스러우면서도 마음은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마냥 즐겁다. 


눈이 부신 길을 걸으니 몇 년 전 연예대상 시상식에서 한 원로 연예인이 김구 선생님의 말을 인용하여 소감으로 한말이 생각난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함부로 걷지 마라. 뒤따라오는 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라.”


그 말을 되새기면서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긴장을 하고 뽀드득 뽀드득 조심스럽게 눈길을 걸었다. 나 역시 고희를 넘긴 나이인지라 뒤따라오는 사람을 위해 바르고 고운 발자국을 남겼는지 지난날을 더듬어 본다. 비단 눈길의 발자국만을 두고 한 말은 아닐 것이다.


요즘 돌아가는 세상이 하도 어지럽다보니 곧 뒤집어질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자칭 잘났다고 큰소리치는 저자들이 과연 후손들에게 본인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 간다. 나 또한 그동안 살아온 발자국이 후손들에게 흠 잡힐 짓은 하지 않았을까 하는 깊은 생각에 잠겨 산길로 접어드니 어렸을 적 학교 길에 산을 넘어 걷던 흰 눈 쌓인 길이 떠오른다.


누군가 앞서간 발자국을 따라 무릎까지 올라오는 눈길을 걸었다.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우리의 선조들이 짚신을 신고 내가 넘었던 그 산을 넘어 오솔길을 걸어갔을 것이다. 눈길에 짚신을 상상해 보니 그 어른들이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세월에도 흐트러지지 않고 꼿꼿한 자세로 자식들에게 본이 되게 살면서, 그 아들의 또 그 아들 그 외 발길을 따라 걸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수천 수백 년의 역사를 다 나열할 수는 없지만 우리 아버지들이 하얀 바지저고리에 흰 두루마기를 입고, 고무신을 신고 신작로의 자갈길을 걷는 것을 보았다. 시대가 많이 발달했다고 말하는 것도 들었다. 왕복 사십 리나 되는 오일장엘 가려면 머리에 이고 등에 짊어지고 아무리 추운 겨울날이라도 구슬땀을 흘리면서도 즐거워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렇게 살면서도 세상에 대해 불평불만 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한 것 같다. 오천년 역사에 수백 번의 침략을 당하면서 배불리 먹지 못하고 헐벗은 생활일지라도 이웃을 사랑할 줄 알고 작은 것도 나누며 단합된 모습으로 열심히 살아 오늘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 어른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인해 도시나 시골 집집마다 자동차가 있어 머리에 이고 지는 역사는 뒤안길로 사라진 지 오래고 우리들은 구두를 신고 아스팔트길을 걷는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넘쳐나고 산길 자갈길은 건강을 위해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이나 걷게 되었다. 


아버지 세대에 비하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러 갈 수 있는 세상이 온 것이다. 세계를 한눈에 보고 들을 수 있게 되었지만 삼강오륜 같은 것 과는 거리가 먼 세상으로 달음질이라도 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세상을 원망하는 목소리는 점점 커져가고 뒤따라오는 후손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마치 유리 구두를 신은 것처럼 조심조심 걸어야하는 세상이 되었다. 부모와 형제 이웃 같은 것은 아예 잃어버린 지 오래이다. 오로지 자신의 영달과 자식의 출세를 위해서라면 위대한 족적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다. 온갖 만행을 다 저지르면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세상이 너무나 안타까울 뿐이다.


나도 그들의 위치에 있었다면 크게 다를 것이 없었겠지만, 가난하고 못 배웠기에 그저 남들 뒤 쫓아 가기에 그리고 흉내 내기에 바빴던 것 같다. 내가 해보지 못한 것에 대리만족이라도 하려는 듯 내 삶은 뒤돌아 볼 겨를 없이 허겁지겁 살았다. 그럼에도 부모역할은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고 큰 소리 치면서도 나이 들어 갈수록 잘난 사람들이 하는 행태를 접할 때마다 자식들에게 시시때때로 미안하다. 이런 점에서는 내 자식들은 힘들었던 내 발자국을 따라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행여 저들의 흉내라도 낼까 마음이 한구석이 노심초사 염려스럽다. 부디 우리의 후손들이 하늘이 부끄러워 삿갓을 쓰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어지러운 세상을 벗어나 이런저런 생각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야트막한 산길을 한 바퀴 돌았다. 그래 과연 나는 오늘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제대로 걸었을까.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니 또박또박은 아니더라도 일정한 걸음으로 흐트러지지는 않은 것 같다. 하얀 눈 위의 내 발자국이 외로워 보이기는 하나 정갈하고 가지런해 보인다. 내 삶의 발자국도 오늘 걸어온 길을 닮았으면 하고 억지를 부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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