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 뿌리고 6]벼슬길에 나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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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 뿌리고 6]벼슬길에 나아가다
  • 조종영 작가
  • 승인 2021.02.18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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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급제 교지
문과 급제 교지

 

조헌이 성균관에 진학한 지 1년 만에 함경도 최북단에 위치한 온성도호부(穩城都護府)의 향교에서 교육을 담당하는 훈도(訓導)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567년(명종 22년) 24세 때, 감시(監試)에서 동당삼장(東堂三場)에 모두 합격하고, 그해 11월 식년 문과에 병과(丙科) 아홉 번째로 급제한다. 
그가 과거에 급제해 처음 받은 직책이 교서관 부정자(校書館副正字)였다. 이는 경서와 서적의 인쇄 등을 맡아보는 일이었다.


다음 해(1568년)는 선조가 등극한 원년이다. 12세에 왕위에 오른 명종이 재위 22년, 32세의 젊은 나이에 승하한 것이다. 이 무렵에 조헌은 평안도 서남해안에 있는 정주목(定州牧) 교수(敎授)에 임명된다. 


정주는 역사적으로 여진족이 잡거(雜居) 하던 곳이었는데, 고려가 북진정책을 시행하며 많은 성을 축조하고 영토로 편입하였다. 지역적 특성으로 고려시대부터 북쪽 오랑캐의 난이 있을 때마다 많은 수난을 겪은 고장이다. 


그러다 보니 학풍은 소홀해지고 선비의 기풍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조헌이 부임해서 2년 동안 교육에 힘을 쓰니 선비의 기풍과 교육에 대한 열의가 되살아났다. 


그가 26세 되던 다음 해에는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정주 땅을 방문했다. 그의 부친 유중영(柳仲郢)이 정주 목사로 있어서 문안하러 왔던 것이다. 유성룡은 조헌보다 두 살 위였다. 
정주에서 만난 유성룡과 시를 주고 받았는데, 그때 유성룡이 떠날 때에 “공강정에서 이별에 임하여 정자 유성룡의 시에 차운하다(控江亭臨別次柳正字而見成龍韻)”라는 조헌의 시가 남아있다.
가을바람 쓸쓸하고 물결은 일렁이는데 / 동남쪽 바라보니 멀기도 하다 / 슬프게도 님이 탄 배 쫓을 수 없는데 / 변방의 외로운 나그네 마음이 어떠할까
秋風蕭瑟動纖波 擧目東南道路悵望仙舟追不得 關山孤客意如何 


젊은 나이에 머나먼 타향 생활은 부모님과 가족들 그리고 정다운 친구 모두가 그리움이었다. 어느 날 밤 꿈에 이웃에 살던 친한 친구 심택중(沈澤仲)이 보였다. 조헌은 홀연히 일어나 그를 그리는 시 한 수를 남긴다.
맑은 새벽 학당에서 외등불 심지 자르며 / 선현을 마주하듯 삼가 두려워함을 배우네 / 게을리 잠든 것도 자못 나쁘지 않으니 / 꿈에 나마 다행히 친구를 만나 보네
黌堂淸曉剪孤燈 對越前賢學戰兢 倦睡也知頗不惡 夢來猶幸見親朋 


심택중(沈澤仲)의 부친은 정언(正言) 심세림(沈世霖)인데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의 어머니 홍 씨(洪氏)는 남편을 일찍 잃고 남편의 벗들이 재앙을 당하는 것을 보고는 아들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글 읽는 것에만 뜻을 두게 되었으며 옛사람의 글귀나 흉내 내고 시문을 짓는 따위의 학문은 하지 않았다.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천일(金千鎰) 의병에 가담하여 군량을 담당했다가 의병이 남쪽으로 이동할 때에 병으로 따라가지 못하고 죽었다. 어린 시절 중봉과는 가장 마음이 통하는 친구였다.


정주는 조헌이 과거에 급제하여 외직으로 나간 첫 번째 임지였으며 젊은 나이에 여러 의미가 있은 고장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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