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향수신문’ 시리즈(1)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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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향수신문’ 시리즈(1)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
  • 송지호 성신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21.04.08 11: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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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취를 위해 달려 온 46년여 간호, 그리고 간호학의 증인. 세상에 없는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던 당찬 도전의 삶, 열정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옳은 길이라는 믿음이 만들어낸 삶. 평생을 간호학자로서 그리고 간호학계의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설계에 도전했던 이야기. 교육자로서 살아 온 성취의 여정, 사랑했던 제자들과의 이야기, 사랑하는 가족 이야기 그리고 성공한 이야기가 아닌 경험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주는 희망의 메시지.
옥천향수신문이 향수의 고장 옥천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가진 저자 송지호 성신여대 명예교수의 자서전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를 매주 연재, 대한민국 국민은 물론 도전을 꿈꾸는 불특정다수의 사람들로 하여금 미약하나마 삶의 지표 설정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편집자 주)

“내가 살아온 작은 이야기가 후배 교수를 비롯해 세상의 아들과 딸, 손자, 직장여성, 어머니, 그 누구에게라도 전해진다면 그들에게 소중한 공감능력과 세상을 조금 달리 보는 진정한 희망과 용기 그리고 지혜를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저자)

“머리 좋아 수재소리 듣는 사람이 사람들을 포용하고 기회가 올 때 양보하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타고난 언변과 직장에서 쌓아온 신뢰 등을 바탕으로 위기가 올 때마다 탁월한 기획력과 해외 인맥의 교섭 창구를 통해 차별화된 활로를 개척하신 것을 보면 NMC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간호계에 잊혀질 수 없는 족적을 남기셨습니다”(성신여대 법학과 전광백 교수)

 

부유했던 시절을 뒤로하고

나는 1948년 6월 대전에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는 대전의 중심가에 벽돌공장 기와공장, 정미소 등 사업을 크게 운영하고 계셨다. 덕분에 우리는 대전에서는 그 당시 내로라할 정도로 부유하게 살았다.

아버지는 인품이 뛰어나신 분이었고 훤칠한 키에 인물 좋기로 소문이 났었다. 또 뛰어난 두뇌와 후덕함으로 주변에 많은 덕을 쌓아 평판이 매우 좋은 분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만나 결혼한 어머니는 그 시절에 드문 신혼여행을 가서 카메라로 신혼여행 사진을 찍는 아버지 때문에 남부끄러워 혼났다고 행복한 불평을 하셨다.

어머니 역시 충북 영동에서 공부 잘하고 머리 좋은 규수로 소문난 분이었다. 그런 어머니는 결혼 후에도 아버지가 마련해 주신 독서실에서 책을 읽고 외부 여성 활동도 하셨다.

우리를 돌보는 일과 집안일은 가정부가 맡아 했다. 우리 가족이 부족함 없이 지낸 행복한 시절이었다.

이렇듯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은 내가 두 돌이 되던 해에 부서지고 말았다. 6.25 한국 전쟁이 터진 것이다.

전쟁이 터지자 아버지는 어머니와 우리 3남매를 충북 옥천의 할머니 댁으로 보냈다. 규모가 큰 여러 개의 사업체 때문에 아버지는 남아서 사업을 정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우리가 먼저 가 있으면 할머니 댁으로 곧 뒤따라오시겠다고 말씀하시고 안고 있던 나를 어머니께 건네려고 하셨다.

그런데 나는 아버지 품에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고 아버지께 달라붙어 떼를 썼다. 그때 아버지는 급한 마음에 내 엉덩이를 살짝 때렸다.

엉덩이를 맞은 나는 서럽게 울며 옥천을 향해 떠났지만 아버지는 내가 울던 모습이 자꾸 눈에 밟혀서 마음이 무척 아팠다고 하셨다.

어머니와 오빠, 언니 그리고 내가 줄줄이 옥천 할머니 댁에 도착해 보니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 세 명의 고모가 사촌들을 데리고 피난 와 있었다.

대전의 부잣집 안방마님이던 어머니와 부유한 집의 귀한 자식들이던 우리는 난생처음 대가족 틈바구니에서 고단한 피난 생활을 시작했다.

우리에게는 아버지 없는 피난 생활이었고 임신 5개월의 임산부였던 어머니에게는 험난한 앞길이 예고되었다.

어머니와 우리 4남매의 피난살이

우리 가족 모두에게 시작된 피난살이였지만 어머니에게는 시집살이까지 더한, 경험해보지 못한 생활이었다.

가정부를 두고 살아 살림도 제대로 해보지 않고 독서와 외부활동을 하며 사셨던 어머니가 하루아침에 가정부가 되어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부엌일은 물론 시누이, 조카들 15~16명의 빨래, 청소까지 감당해야 했다.

물론 일하는 심천댁이라는 아주머니가 한 사람 있었지만 거의 모든 일은 어머니 차지였다.

한겨울 꽁꽁 얼어붙은 우물가에서 그 많은 빨래를 하다 보면 쪼그려 앉은 양쪽 고무신 바닥의 얼음이 체온으로 녹아서 두 발이 얼음 속으로 빠져들기 일쑤였다.

그렇게 생긴 손과 발의 동상으로 밤이 되면 어머니는 매번 고통스러워하셨다.

온갖 집안 일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오신 후에도 어머니의 일은 끝난 게 아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치마저고리, 바지저고리, 버선에 솜을 놓아 만들어 드려야 했다.

어머니는 바느질은 물론 음식 솜씨까지 좋기로 소문이 날 정도였지만 호롱불 밑에서 하는 바느질은 참으로 고단한 일이었다.

눈이 많이 내리던 겨울 어느 날 우연히 장독대에 서서 허공만 쳐다보고 계신 어머니를 발견했다.

어머니의 머리와 어깨에는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어렸지만 그렇게 서 계시는 어머니를 나는 차마 부르지 못하고 못 본 척 방으로 들어왔었다.

다섯 살 어린 철부지 내 눈에도 어머니의 혹독한 시집살이의 서러움은 아픔으로 다가왔다.

할머니는 당시 일반 여염집 여자들과는 달리 무척 똑똑하신 분이었다.

당시에도 온종일 몇 가지 신문을 모두 정독하신 분이셨다.

그때는 아버지를 비롯해 동네에서 머리 좋고 인물 좋기로 소문난 세 아들이 모두 행방불명으로 풍비박산인 상태였다.

그래서 할머니는 늘 혼잣말처럼 말씀하셨다.

“내 아들 셋이 이 추운 겨울에 어디서 어찌 지내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에미된 내가 어찌 따뜻한 방에서 발 쭉 뻗고 편히 잘 수 있겠냐.”

실제로 할머니 방에는 일체 불을 지피지 못하게 하시고 차디찬 냉방에서 추운 겨울을 지내신 분이었다.

가문으로 보면, 할머니는 고 육영수 여사의 고모로서 육 여사와 아버지는 사촌지간이다.

그래서 시댁 우암 송씨 양반과 친정 육씨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무척 크셨다.

항상 우리에게 ‘언제나 떳떳하게 살고 당당하게 행동하며 가문의 뿌리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살라’고 가르치신 그런 배경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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