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과 한국전쟁 ‘옥천척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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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과 한국전쟁 ‘옥천척화비’
  • 오현구기자
  • 승인 2021.04.15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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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의 쇄국 의지가 새겨진 옥천 척화비.
흥선대원군의 쇄국 의지가 새겨진 옥천 척화비.

 

서화천과 삼양 삼거리 사이에 있어 놓치기 쉬운 지점인 옥천읍 삼양리 산4-4번지에는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가 세워져 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척화비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를 하는 것이니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뜻의 한문이 새겨져 있다.

흥선대원군의 서구열강과 통상수교 거부 의지가 어떠했는지 짐작이 된다.

흥선대원군도 처음부터 통상수교 거부 의지가 강하지는 않았다. 1863년 고종 임금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아버지 이하응은 흥선대원군으로 봉해져 전권을 장악했다.

그 당시 동아시아 정세는 서구열강들의 제국주의 확장으로 인해 긴박하게 흘렀다.

불과 3년 전인 1860년 영국-프랑스 연합군에게 패한 청나라에서 베이징조약을 맺고 러시아에 연해주를 넘겨주면서 조선과도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국경이 맞닿은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와의 교섭을 시도했다.

하지만 1866년에 겪은 병인양요에 이어 아버지인 남연군 묘를 독일인 오페르트가 도굴하려 했다는 보고를 받고 ‘통상수교 거부’정책으로 급선회하게 된다.

특히, 대동강까지 거슬러 올라 통상을 요구하며 대포 등 무력을 사용한 ‘제너럴셔먼호’가 평양성 주민들에 의해 불태워지면서 1871년 신미양요가 발생한다.

신미양요까지의 사건을 겪은 흥선대원군은 서구열강의 무력을 앞세운 통상교섭과 수교를 거부하는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수립했다.

이어 1871년 음력 4월에는 전국의 교통 요충지 200여 곳에 척화비를 세우도록 지시했다.

‘옥천척화비’가 세워진 삼양리 사거리는 현재도 보은과 옥천, 금산을 잇는 37번 국도와 대전과 옥천, 영동을 잇는 4번 국도가 교차하는 곳이다.

1871년 당시도 ‘옥천척화비’ 인근 삼양 삼거리 갈림길 일원에 가화역이 있어 관리가 마패를 보이면 역마를 징발할 수 있는 교통 요충지였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가화역에는 역리 39명, 역노 5명, 대마 3마리, 기마 6마리, 복마 1마리가 있었다고 하며 1896년 폐지됐다고 한다.

‘옥천척화비’가 세워진 지 11년 후인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 흥선대원군은 청나라 장수 오장경·마건충에 의해 중국 톈진으로 납치됐다.

이어 실권을 잡은 명성황후가 문호 개방을 확대하면서 일본공사의 요구에 따라 철거되거나 매장했으나 ‘옥천척화비’는 산기슭에 있는 관계로 철거하지 않고 땅에 묻기만 했다고 한다.

척화비는 현재 전국 각지 30여 곳이 남아 있는데 그중 하나가 충청북도 기념물 제6호로 지정된 ‘옥천척화비’다.

비석을 보면 총탄에 의해 옆 테두리가 많이 파손됐고 자국도 많은데 그 이유는 멀리서 보면 사람처럼 보여 한국전쟁 당시 전투기에서 적으로 잘못 알고 기관총 사격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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