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언적 명령과 가언적 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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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언적 명령과 가언적 명령
  • 김병학 편집국장, 언론학박사
  • 승인 2021.04.22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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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히테, 셀링, 헤겔로 이어지는 독일 관념철학의 기초를 놓은 그, 프로이센의 철학자이자 근대 계몽주의를 정점에 올려 놓은 그, 이성 그 자체가 지닌 구조와 한계를 연구한 저서 ‘순수이성비판’을 집필한 그,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를 일컫는 수식어들이다.

칸트는 일찍이 ‘선행’이란 이타(利他)나 대의(大義) 혹은 공존공영을 위해서 하는 행위라기보다는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라는 오직 그 이유 때문에 하는 행위라고 했다.

즉, 윤리 도덕은 우리 모두에게 혹은 다수의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가치’ 있다고 했다.

대가없는 선이 진정한 ‘선’

예를 들어, 언젠가 내가 이웃에게 도움을 청하게 될 때를 생각해서 항상 이웃에게 친절하라는 따위의 가언적 처세훈들은 도덕적 선이 될 수 없다.

아무런 가식없이, 아무런 대가없이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선행이야말로 진정한 ‘선행’이라고 칸트는 말하고 있다.

칸트는 이어 선은 인격적 주체의 가치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자체가 목적이지 무엇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고 했다.

또한 사람은 인격의 주체이고 주체란 문자 그대로 무엇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될 수 없는 그 자체가 목적이라고 강조했다.

그런 그가 ‘정언적 명령’(categotical imperative)을 강조했다.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으로 따라야 할 의무’ 즉 ‘개인의 특정한 욕망과 관계없이 꼭 해야만 하는 일’을 강조하고 있다.

그게 바로 칸트는 ‘선행’이라고 했다.

그는 또 사람을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로 봐야 한다고도 했다.

그만큼 사람의 인격과 가치를 최고선으로 생각했다.

‘가언적 명령’이 문제

문제는 ‘정언적 명령’이 아닌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꼭 해야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가언적 명령’(hypothasis imperative)이다.

이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너무도 깊이 와 박히는 따가운 질책이 아닐 수 없다.

만일 칸트가 작금의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아마도 어느 한 구석도 사람다운 면이라고는 약에 쓸래도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사람을 목적으로 대하기는커녕 만나는 순간부터 헤어지고 나서까지도 오로지 수단으로만 생각한다.

나에게 이익만 된다면 상대방은 무조건 자신의 수단으로 작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현대인들은 ‘가언적 명령’에 너무도 충실한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라면 너무도 당당하게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평소에는 ‘봉사’라는 ‘사랑’이라는 단어와는 담을 쌓고 살아온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무슨 ‘장’자리라도 하나 꿰차는 날에는 평생을 봉사하며 살아온 사람처럼 거들먹거리고 유세를 떤다.

참으로 목불인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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