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 뿌리고(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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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 뿌리고(16)
  • 조종영 작가
  • 승인 2021.04.29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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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진 현감 부임과 율곡 선생의 당부

통진 현감(通津縣監)으로 제수된 것은 1575년(선조 8년) 12월이었다.

고향 김포 현과 가까운 이웃인 통진 현감에 부임하는 마음이 남달랐을 것이다.

그곳은 나주 목사를 지낸 5대조 환(環) 그리고 증조와 고조 3대가 살았던 고장이고 그분들의 묘소도 그곳에 있었다.

통진 현감에 부임하기 전에 그는 스승인 율곡 선생에게 어떻게 하면 백성들을 위한 선치를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조언을 구한다.

이때 율곡 선생은 당부의 말씀과 함께 자신이 생각한 바를 주문한다.

율곡 선생은 “한 읍을 다스리는데 두 가지 방안이 있다. 즉, 백성들의 이익을 더하고 해독을 제거하여 풍족하게 살게 함이 상책이고, 구폐(舊弊)를 요량하여 덜어줘서 맑고 깨끗하게 함이 차선이다. 앞서 말한 것은 번거롭고 요란스럽게 해서 실수하면 백성들의 원망이 일고 뒤에 말한 것은 소탈(疏脫)함에 빠지면 이정(吏情)이 해이(解弛)하니 일하면서도 번거롭지 않게 하고 하지 않으면서도 성글지 않은 연후에야 가히 십 실(十室)의 읍(邑)을 다스릴 수 있다.” 라고 한 고을의 수령으로서의 필요한 가르침을 주었다.

또 여식(汝式, 조헌의 字)은 독서하고 궁리하며 마음은 사물을 아끼고 사랑하는 데 쓰고 있으니 이제 하나의 목숨 뿐 아니라 반드시 많은 백성을 구제할 것이라고 말했다.

율곡은 조헌이 통진 현감으로 있을 때 그동안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시행하지 못했던 한 가지 방책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그는 조헌에게 이렇게 말한다. “옛날에 읍(邑)을 다스리는 자는 백성의 세금으로 봉급을 만들었다. 정해진 봉급 제도가 있어서 먹고 남은 것은 친구들에게 두루 나눠주었다. 지금은 그렇지가 못하고 읍을 다스리는 수령에게 정해진 봉급이 없다. 두미(斗米) 이상은 모두가 국유 물이니 비록 백이(伯夷)와 같이 청렴한 사람이 수령 노릇을 한다고 해도 국유 물을 사사로이 사용치 않으면 먹고살 방법이 없다, 이것은 국법이 제대로 갖추어 있지 않은 것이다. 이에 군자도 법을 지키기 어렵게 되었으며 빈관(貧官)들의 법을 어기는 것이 매우 심하게 되었다. 국가에 바치는 공물과 세금 외로 거둬들이는 것에 백성들이 감내키 어렵게 만들었다. 다행히 의창(義倉)이 있는 고을에는 봄철에는 양곡을 대여했다가 가을에 거둬들일 때 일 할을 증수하는데 이 모곡(耗穀)이라고 하는 것이 수령이 사용할 수 있는 통례가 성립되어 있다. 내 어리석은 생각이지만 과감(科歛, 세금 외에 거둬들이는 것)을 모조리 혁파하고 한 해의 모곡(耗穀) 중 삼분지 일은 아속(衙屬)들에 주고 또 일부는 사객(使客)이나 친구들의 응수(應需)로 쓰고도 일 분(一分)의 잉여가 있을 것이니 이 방법이 가히 시행할 수 있을 것인지 알 수 없겠다.”

율곡은 조헌이 취임하면 이 방책을 시험 삼아 해보고 의논하기를 바랐다.

이미 지방 수령과 서리들의 녹봉 문제는 이미 조헌도 그 폐단을 인식하고 일정한 급여를 지급할 것을 선상8조소와 의상16조소에서 상언한 바 있었다.

현감으로 재직하며 조헌은 스승의 당부를 잊지 않고 백성들을 사랑하고 스스로 검소하며 옛 폐단을 없애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이로써 점차 이서(吏胥)는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편히 살게 되었다.

그러나 뜻밖의 일로 모든 계획이 수포가 되고 만다.

어느 날 권세를 믿고 모진 행패를 부리는 오만방자한 관노를 치죄하다가 그만 죽게 되는 일이 있었다.

이 일로 지방의 간사한 무리가 무고하여 결국 누명을 쓰고 34세가 되던 1577년 겨울 달포를 구속되었다가 인근 부평으로 귀양을 가게 되고 말았다.

 귀양 간 지 얼마 안 되는 이듬해 1월 24일에는 부친 응지공(應祉公)까지 세상을 떠났다.

그는 몇십 리 밖이 생가였으나 죄인의 몸이라 조상(弔喪)하지 못하고 애만 태웠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가장 의지하던 아버지이다.

어찌할 수 없는 안타까움에 아침저녁으로 통곡하는 소리가 얼마나 비통하고 구슬펐던지 듣는 이가 감동하여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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