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당일, 순국의 길을 택한 홍범식
상태바
경술국치 당일, 순국의 길을 택한 홍범식
  • 옥천향수신문
  • 승인 2021.09.16 10: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 당일 죽음으로써 조선에 충성을 다했던 홍범식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 당일 죽음으로써 조선에 충성을 다했던 홍범식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 당일,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잡기엔 내 힘이 무력하기 그지없고 망국노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스스로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구나. 피치 못해 가는 길이니 내 아들아 너희들은 어떻게 하던지 조선사람으로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빼앗긴 나라를 기어이 되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 이 글은 홍범식 선생이 자결하기 전 아들에게 남긴 유서의 내용 중 일부이다. 

홍범식(洪範植, 1871. 7. 23~1910. 8. 29)선생은 충북 괴산군 괴산면 인산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풍산(豊山), 호는 일완(一玩), 자는 성방(聖訪)이다. 가문은 사도세자 비빈이자 정조의 생모인 혜경궁 홍씨 집안으로 조선후기 대표적인 명문가 중 하나였다. 조부 홍우길은 한성부 판윤, 이조판서 등을 지냈고, 부친 홍승목은 이조참의, 병조참판, 궁내부 특진관 등을 역임했다.
명문가의 후예로 어려서부터 성리학을 공부하며 충효의 의리와 절의를 최고의 덕목으로 삼아 익혔다. 부모를 섬기는 데는 효로 하고 사람을 맞이하는 데는 후덕하게 하며 성정이 학문을 좋아하여 어릴 때부터 장성할 때까지 유교 경전을 읽고 암송하는 일이 끊어지지 않았다. 그 결과 1888년 진사시에 합격했고 1902년에 내부 주사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들어섰다.

이후 혜민원 참서관 등의 관직에 있으면서 일본의 침략과 그에 따른 국망의 상황을 인식했고 1905년 11월 을사조약의 체결 소식을 듣고는 매우 비분강개했다. 1907년 태인군수로 발령받았을 당시 태인군에서는 아전들의 탐학이 심했을 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이 의병전쟁과 관련하여 무고하게 잡혀 죽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런 상황에 군수로 부임하여 의병부대를 진압하려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를 설득하여 무고한 백성들이 피해를 보는 일이 없도록 힘썼다. 나아가 군수로 재직하는 동안 일체 백성들을 수탈하지 않음은 물론 황무지 개척과 관개 수리사업을 시행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이에 감동한 군민들이 마을마다 송덕비를 세워 그 수가 38개에 이르렀다고 하니 그의 인격을 짐작할 수 있다. 그 하나가 지금도 정주시 산외면 오공리 야정 마을에 남아있는 ‘군수 홍범식 선정비’이다. 1909년 금산군수로 있을 때 국유화될 위기에 놓인 백성들의 개간지를 사유지로 사정하여 주는 등 위민행정을 폄으로써 칭송을 받았다. 

그는 조선의 한일병합조약 조인 소식을 듣고서 ‘아아 내가 이미 사방 백리의 땅을 지키는 몸이면서도 힘이 없어 나라가 망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니 속히 죽는 것만 못하다’라고 탄식했고 미리 유서를 써 놓았다. 1910년 8월 29일 드디어 한일합병조약이 공포되자 이날 저녁 재판소 서기 김지섭에게 상자를 하나 주어 집으로 돌려보낸 뒤 관아의 객사 안으로 들어가 북향하여 황제에게 예를 표한 뒤 목을 매어 자결하려 했다. 이 때 이를 알아챈 고을 사령이 통곡하며 만류하자 선생은 화를 내며 그를 밀치고 이내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한편 김지섭은 선생이 맡긴 상자를 열어 보았더니 가족에게 남긴 유서와 함께 ‘나라가 망했구나. 나는 죽음으로써 충성을 다하련다. 그대도 빨리 관직을 떠나 다른 일에 종사하라’는 편지가 들어 있었다. 그 뒤 김지섭과 고을 사령 일행은 객사 뒤뜰 소나무 가지에 목을 맨 채로 죽은 선생을 발견했다. 

순국 당시 선생의 나이는 갓 마흔에 불과했으니 그 애절하고 원통함이 더욱 컸다. 1962년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