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형은 아이스케끼 팔던 민간인 이었다”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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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형은 아이스케끼 팔던 민간인 이었다”③
  • 천성남 국장
  • 승인 2016.07.2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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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년간 은폐돼 오다 비로소 백동호의 동명소설로 영화화된 ‘실미도’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 충격 실화 실미도 사건의 끝나지 않은 그날의 진실을 재조명한다. 지난달 24일 본사를 찾아온 2명의 유족들로부터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 이야기는 다시 시작된다. 1968년 3월, 옥천지역에서 한꺼번에 행방불명됐던 7명의 청년 중 한 사람이었던 이광용(당시 일일노동자)의 동생 이경주(59·옥천 장야리)씨와 대전 한밭체육관 권투선수였던 이명구의 동생 이명철(59)씨다. 이들 유족은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된 혈육을 찾기 위해 전국을 동분서주 했던 처절했던 체험담을 꺼내놓으며 타들어가는 듯 입술을 적셨다. 본란은 국방부진상조사보고서, 유족 증언을 바탕으로 10회 연재된다.         〈편집자 주〉

 

21년간 공군에 몸담았던 대전의 이명철(이명구의 동생)씨는 실종된 가족의 진상조사를 위한 유족모임 총무를 맡아 일해 왔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 일을 맡아 진상조사 작업을 해오는 동안 여러 가지 문제로 군에 물품을 조달했던 업무마저 뚝 끊겨 버렸다고 하소연했다. 생업에 전전긍긍하던 그는 현재 보험업에 종사하고 있다. 형의 소식을 어렴풋이 알게 됐던 10년전, 이명구의 어머니는 치매를 앓게 되었고, 지금까지 병환으로 고생하시다가 지난 2015년 12월에 작고 하셨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또, 올해 6월 6일 쯤 만나서 협상을 하자고 했던 정부 관계자로부터 “나중에 전화 하겠다”라고 말한 채 연락두절되는 등 정부의 무성의한 처사에 진저리를 쳤다. 옥천출신 이광용의 동생 이경주(59옥천 장야리)씨는 “11살 차이였던 형은 끌려갈 당시 안내면을 오가며 아이스케키를 팔았고, 관내 K제조업에서 철근 일을했던 순수민간인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옥천에 있는 또래 친구 7명과 몰려다니며 마실을 다녔던 순수민간인이었는데 어떤 회유책으로 끌고 갔는지 지금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몸서리를 쳤다.

▲ 훈련 일과

1968.4~5월간 계획 실시된 기본 훈련일과는 다음과 같다.‘공군 2325부대, 오소리교육계획서 및 장비신청서 제출’ (공작비 제51호 1968.5.13.) 오전일과 기상(4:30), 점호(4:35), PT체조(4:40), 내무반 정돈, 세면(6:30), 조식(7:00), 오전훈련(8:00), 휴식 및 중식(11:45), 오후 훈련(13:00), 국기하강식(17:00), 석식(17:10), 내무교육(18:10), 일석점호(21:30), 취침(22:00)훈련이 숙달됨에 따라 훈련일과 및 과목이 바뀌었다. (재판기록2권) 오전 일과, 기상 후 섬 일주(1.5㎞) 3회 구보 후 체조, 식사(6:00), 오전훈련(8:00), 휴식 및 중식(12:00), 오후 훈련(13:00), 목욕, 석식, 내무교육, 무술훈련, 자유시간(17:00), 일석점호(20:30), 취침(22:00) 

▲ 부대관리

△ 보급수준 : 시설 및 물품보급은 창설 당시 초기에는 중앙정보부에서 지급 받은 정보비로 위장복 등 보급품을 구입하고, 기간병과 모집된 공작원이 기지를 공사하였고 초창기에 약 11개월 동안은 이틀에 한번 씩 신탄진 한 갑을 주다가 백조, 금잔디, 화랑 등으로 바뀌었으며 5개월에 한번 씩 군화 지급을 받고 훈련화, 작업복은 1년에 평균 2벌, 수시로 일용품과 티셔츠, 팬티 등이 지급되었다. 

△ 보수 지급 : 공작원들의 봉급은 최초 3개월은 1인당 매월 3,200원씩 1인당 도합 9,600원이 지급되었으나 그 후는 지급된 사실이 없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임성빈 외 3명의 생존공작원들은 수사과정에서 일관되게 진술하였다. 또한 임성빈은 받은 급료는 전혀 써보지도 못했고, 조장이 전부 가지고 있다가 소대장이나 교관이 외출 나갈 때 외출비로 바쳤으며, 그 이유는 너무나 달달 볶고 기합과 고통이 심하기 때문에 좀 더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까하여 상납했다고 진술하고 있다.(재판기록3)

△ 급식 및 부식 : 초기 3개월 간 쌀은 일반미를, 쇠고기는 시중의 고급육을 일반 군인지급분의 3배가량을 보급하는 등 양과 질에 있어서 최고의 급식(실미도 사건조사보고서, 2005. 8.8)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그 이후의 급식 및 부식 관계에 관하여는 생존 공작원들과 기간요원들의 수사과정에서의 진술이 상당 부분일치하지 않고 있다.

여기서는 관계자들의 재판 당시 진술과 관련, 자료들의 기재 내용들을 소개하기로 한다.

△공작원 이서천은 재판기록에서 입대후 1개월 동안은 쌀밥에다 쇠고기(사골)국이 나왔고 계란도 한 개씩 주었는데, 그 후부터 고깃국도 나오지 않고 된장국 또는 소금국에 보리밥을 주어 오다가, 약 1년 전(1970.8.)부터는 수제비로 대용하고 또는 보리밥에 소금국, 시레기국 등 아주또 부식이 나빠졌고 약1개월 전(1971.7.)부터는 밀밥을 해주었다(재판기록1권).

△ 공작과장 이형복은 재판기록(1971)에서 공작원 1인당 주식비 100원, 부식비200원, 정식부식비 39원 계 339원이라고 진술하였는데(재판기록1권), 서류상 1971년도 공작원들의 주부식비는 1인당 1일 223원(현역은 119원 1전임)이 책정되어 있었으나 본인들은 자기에게 지급되는 주 부식비의 양이 얼마인지 모르고 있었다(국방부 군특명검열단, ‘군특수범난동사건조사보고서’(1971.8.30.)

△기간병 조○○는 재판기록에서 물품 수령경위에 대하여(재판기록)

-2325부대 군수과장, 작전과장의 결재하에 공작과장도 간여하였으며 부식비 5만5000원을 수령하여 자신이 보관하고 취사담당 병장 정○○이 807파견대로 물품 수량 및 종류를 알려주면 1주일 분 씩구입하여 탁송하였고, 

-상점에서 영수증을 받아 교육대장에게 명세서를 대개 1주일 간격으로 보고하면, 교육대장은 이것을 구두, 또는 서면으로 209대 파견대장 소령 한총에게 보고하였고

–부식비가 50명분인 이유는 사망한 강찬주, 황철복, 강신옥이 사망한 것을 삭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공작원 개인 명의로 보급품과 부식비가 공군2325부대 본부에서 나오고 있다고 진술하였다(재판기록1권).

-실제 급식 내용과 달리 취사장에 비치된 장부상으로는 매일 계란 1개, 두부가 월 10~20상자, 쇠고기, 돼지고기, 생선 기타 좋은 부식을 먹이는 것으로 기입되어있는 것을 보았고 외부 인사나 고위층에서 시찰 오면 교육대장이 그 장부를 보여주었으며 3년 이상 긴 세월을 배를 굶주려서 개밥 또는 수제비를 했다가 돼지 먹이로 준 것을 몰래 먹기도 했으며, 훈련과 정에서 익힌 대로 날뱀을 잡아먹기도 하였다(재판기록1권).〈다음호에 이어〉

옥천출신 이광용 동생 이경주(장야리)씨와 대전출신 이명구 동생 이명철씨가 진상조사보고서에 대한내용을 밝히며 쌓였던 울분을 토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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