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뿌리고(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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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뿌리고(93)
  • 조종영 작가
  • 승인 2022.12.08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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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이다

충청우도에서 올린 충의의 깃발

충청우도에서 조헌은 새로운 계획으로 의병모집에 들어갔다. 조헌이 의병을 모집한다는 소문이 각지에 전해지자 그의 충의를 흠모하는 많은 선비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이때에 기병을 적극 도운 인물로 옥천에서 동행한 문인 외에 이광륜(李光輪), 장덕개(張德盖), 신난수(申蘭秀), 고경우(高擎宇), 노응탁(盧應晫) 등이었다. 이러한 선비들이 힘을 모아 조헌을 적극 도왔다.

의병모집은 생각보다 짧은 기간에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원근의 의사들은 마치 조헌을 기다렸다는 듯이 며칠 만에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의병에 지원한 사람들 중에서 관군으로 나가야 할 사람들은 모두 돌려보냈다. 그리고 남은 의병이 1,600여 명이었다. 실로 며칠 만에 이루어진 놀라운 성과였다. 비록 전날에 순찰사와 크게 마음 상하는 일이 있기는 하였으나 다시금 힘과 용기가 솟아났다. 

홍주에 사는 전 참봉(參奉) 이광륜(李光輪)은 아버지께 재배(再拜)로 결별하고 부인으로 하여금 내복에 문(文) 자를 새기도록 한 후에 향병(鄕兵) 수백 명을 모아 참여하였다. 공주에 사는 노응탁(盧應晫)과 응환(應晥), 응호(應皓) 3형제가 함께 의병에 참여했다. 평소 조헌 선생의 곁에서 활동하던 옥천의 선비 김절(金節)은 동생 김약(金籥), 김로 등 형제와 더불어 향병 등을 모집하여 참여했는데 김로는 조헌 선생의 사위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양사(兩司)를 거쳐 평택 현감을 지낸 명광계(明光啓)가 수백 명의 의병을 이끌고 가담했다.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과(副司果)를 지낸 양철(梁鐵)은 향병 수십 명을, 참봉(參奉) 김형진(金亨進)은 백여 명을 모집하여 참여했다. 이허(李許)도 향병 수십 명을 모병했고 김결(金潔)은 가정(家丁) 70명과 병기와 군량을 싣고 의병진에 합류했다. 한응성(韓應聖)도 가동(家童) 수십 명을 모집하고 강위구(姜渭龜)는 장사들을 모아왔다. 참지(參知) 이윤(李潤)은 남원에서 가동과 함께 올라와서 의병에 합류했다. 또, 남원의 정민수(鄭民秀)는 조헌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삼종제 회(繪)와 창의하여 장정 105명을 거느리고 합류했다. 이외에도 여러 선비와 중봉의 문인, 제자 등이 의병을 모아 참여함으로써 군소 집단들이 모여서 1,600여 명의 큰 의병부대를 구성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중봉 의병의 면면을 살펴보면 조헌과 친족관계에 있는 사람도 있으나 대부분 학문적인 관계에 바탕을 둔 문인들이 주축이 되었다. 조헌은 일찍이 정주, 파주, 홍주목 교수(敎授)와 공주 제독관(提督官) 등 교육을 담당하는 관직을 두루 거쳤다. 그때 인연을 맺은 문하생들이 선생의 기병 소식을 듣고 적게는 수 명으로부터 많게는 수백 명에 이르는 의병을 모집하여 가담한 것이다. 김절, 전충남, 전설, 박충검 등은 옥천의 문하생이고 박사진, 김성원, 조경남, 고명원, 윤여익, 정린, 양응장, 노응환, 백호섭 등은 조헌이 관직에 있을 때의 문하생들이다.

그 외에도 문·무관으로 관직에 나아갔던 사람, 옥천 동향의 문인 등 조헌과 인연이 있는 인물들이 참여했다. 대과에 급제한 정립, 군수와 현감을 지낸 한호, 정담, 양응춘, 명광계, 교리 성호선, 판관 오대걸, 주부 박광조, 정기룡, 참봉 이광륜, 황진, 조방장 백강언, 병사 서건, 만호 변계온, 선전관 김응수 등은 전직 관료 출신이다. 

특히, 무과에 급제하거나 무예에 특출한 사람들도 많았는데 양철, 오대걸, 박광조, 금응신, 김응수, 김헌 등이 무과 급제자이고 김성진, 임정식, 곽자방 등은 무예에 특출하거나 문무를 겸비한 사람들이다. 

이와 같이 중봉 의병은 대부분 조헌의 문하생들을 비롯한 선비들이었지만 전직 관료, 무관, 장사 그리고 향병(鄕兵 그 지방 사람으로 참군한 사람), 가정(家丁 집에서 부리는 일꾼), 가동(家童 집에서 심부름하는 아이) 등 양반과 천민을 막론하고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의병에 참여함으로써 전란에 임하여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충의로 가득했다

조헌의 기병은 문하생과 선비들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으나 모든 것이 조헌 선생의 주관하에 성공한 단독 기병이라는 점에 의의가 크다. 이는 당시 조헌의 사회적 명망과 학문적 위치를 말해주는 것이다. 

중봉 의병이 왜적과의 전투에서 뛰어난 용맹을 떨칠 수 있었던 것도 문·무를 겸비한 의병들이 조헌 선생을 구심점으로 절의 정신의 정신적 토대 위에서 강한 결속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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