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이는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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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이는 오지 않았다
  • 권예자 수필가
  • 승인 2023.01.05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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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의 추억

여고를 졸업한 이듬해 성탄절이었다. 내 20대 초반의 성탄전야는 친구들과 함께 밤을 지내야 즐겁게 보냈다고 인식되던 때였다. 나도 단짝들과 만두를 빚어 밤참을 먹고, 다과를 나누며 학창 시절의 추억을 건져내고는 했었다. 

그날도 개인적으로 가까운 사람과는 미리 선물을 교환하고 우리는 10시에 순이네 집에서 모였다. 매년 만나던 여섯이 모였는데 이번에 처음 함께하기로 한 옥이는 아직 오지 않았다. 한 친구가 말했다.

“그 애를 왜 우리 팀에 넣었어? 소문이 안 좋던데.” 

“그래? 옥이는 밝고 착하잖아. 무슨 일 있어?”

“살림을 차렸다더라.” 

“뭐? 겨우 스무 살에 결혼식도 안 올리고?”

시쳇말로 쇼킹한 이야기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처녀가 살림을 차린다는 것은 해서는 안 될 큰 사건이었다. 

옥이는 예쁘고 명랑하며 영리했다. 공부도 잘한 편이었는데 친구가 없이 늘 혼자 다니곤 했다.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 이번 성탄절엔 우리 모임에 오고 싶다기에 그러라고 한 내 입장이 난감하였다.  

그녀는 플라이급 권투선수와 사랑에 빠졌단다. 둘 다 시골에서 올라와 자취하던 처지여서 여고를 졸업하자 바로 방을 합쳐 버렸다고 했다. 

얼마 전 친구가 저물녘에 만났는데 옥이는 남장에 검은 모자를 쓰고 그 선수는 스커트에 하이힐을 신고 팔짱을 끼고 희희낙락하며 걸어가더란다. 민망해서 인사도 못 했다고 한다. 우리는 옥이 때문에 손해나 입은 것처럼 그들을 도마 위에 올렸다. 

그래도 만남은 즐거웠다. 또 다른 많은 이야기가 흐드러진 웃음 속에서 오고 갔다. 그중에도 이성 친구에 관한 이야기는 가슴을 달콤하게 했고 새로 들어간 직장에서의 스트레스는 공감을 자아냈다. 자정엔 성당에 가서 함께 미사를 드렸다. 

우리가 그 성당의 미사에 참여하는 것은 성탄을 거룩하게 보낸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그날은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사님들이 미사에 참석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모자가 달린 갈색 수도복을 입은 수사님들이 앞자리에 나란히 앉아 계신 모습은 직접 만나보지 못한 예수님처럼 성스럽게 느껴졌다. 

그뿐인가, 성체를 모시는 경건하고 조용한 걸음걸이며 성가를 부를 때의 은은한 음성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부드러운 매력으로 처녀들의 마음을 사로잡을만했다. 

그렇게 밤을 새우고 우리가 헤어질 무렵까지 옥이는 오지 않았지만, 누구도 그녀를 기다리거나 궁금해하지 않았다. 우리 마음속에는 행실이 나쁜 옥이는 친구가 아니라는 생각만 가득했던 것 같다. 

두 달이 지나서야 나는 옥이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것도 우리와 만나기로 했던 그 성탄 이브에. 집주인의 말에 따르면 그날 저녁 어린 연인들은 심하게 말다툼을 했다고 한다. 

남자가 화를 내고 나가버린 사이에 그녀는 아궁이의 연탄을 방안에 들여놓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세상을 버렸다고 했다. 

아침에 돌아온 남자가 반은 정신이 나가서 울부짖으며 그녀를 끌어안고 놓지 않았지만 가족들은 옥이를 빼앗아서 그날 바로 떠나보냈다는 것이다.

참혹한 충격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 종종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던 사건이 우리에게 일어나다니 어이가 없었다. 더구나 그날 우리들의 말이나 행동도 용서하기 어려웠다. 그것은 예수님의 뜻과는 전혀 상반된 것이었다. 친구가 죽어가는 시간에 우리는 그녀를 매도하고 잘난 척하기에 급급했었으니까. 

그날 이후로 당시의 친구들은 성탄절을 함께 지내지 않았다. 입 밖에 내어 말한 적은 없지만 각자의 마음속에는 우리가 그날 간접적으로 옥이를 죽였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지 않는 옥이를 걱정하며 집에 찾아갔더라면 그녀를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은 서로 사랑했고 자신들의 순수한 감정에 충실했다. 형편에 의해 순서를 바꾸어 살림 먼저 차렸던 것뿐인데, 세상 사람들은 왜 그들을 죄인처럼 여겼을까? 

해마다 성탄절은 오고 나는 종종 그날을 생각한다. 스무 살 옥이를 옥죄인 사슬은 둘 사이의 말다툼이 아니다. 자신에겐 로맨스인 일이 남이 하면 스캔들이 되는 자기중심적 사고방식과 편견이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하느님은 좋은 가문의 그럴싸한 아가씨들 다 제치고 시골 처녀 마리아를 성모로 선택했다. 또 만왕의 왕 예수는 외양간 말구유에서 태어나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었다. 왜 그랬을까?

올해도 성탄에 기쁨과 사랑을 나누는 사람이 많겠지만,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또 울고 있을 것이다. 

올해는 그 눈물을 닦아줄 깨끗한 손수건 한 장 준비해 두고 싶다. 옥이에게 선물하지 못한 손수건 한 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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