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고효자 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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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고효자 전식”
  • 전순표 옥천향토전시관장
  • 승인 2023.05.11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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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고 효자 전엽 생원

 조선 중기인 명종 21년(1566년) 1월 19일 생원 전엽에게 효자 포상했다. 

 옥천 사는 생원 전엽(全燁)은 천성이 공손하고 순수하여 사람을 성심으로 대접하고 어버이를 효성을 다해 섬겼다. 그의 아비인 목사 전팽령(全彭齡)은 벼슬을 마친 뒤로 청백하여 끼니도 자주 어려운 처지로 고향 옥천 동이면 금암리에서 빈궁하게 살았다.

 그러나 전엽은 힘을 다해 아버지를 봉양하기 위해 맛있는 음식을 적극 마련하였고 그 음식이 남으면 반드시 아비가 주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주고자 했다. 그리고 늘 아버님 슬하를 떠나지 않고 항상 옆에서 모시는 것을 임무로 삼았다.

향시 장원, 벼슬 관심 없고 
오직 아버지 봉양 지극정성
 

 그는 평소 벼슬에는 전혀 뜻이 없었다. 기유년에 아비의 명령을 어기기 어려워 고향에서 보는 초시인 향시(鄕試)에 장원하였으나, 관직을 얻는 것에 급급하지 아니하여 2차 과거 시험인 회시(會試)에 응시하지 않았다.

 평소 오가는 빈객이 그 아비를 방문하면 몸소 반찬을 마련하여 그 마음을 기쁘게 하였고, 병을 간호할 적에는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약은 반드시 먼저 맛보았으며 옷에는 띠를 풀지 않았다. 

 어버이상을 당해서는 초상을 치르는 절차를 일체 예법에 따랐고,

3년 탈상 후 한결같이 참배, 
계모 하늘같이 지성으로 돌봄

 삼년상을 마친 뒤에도 외출하고 돌아와서 참배하는 것을 평소와 같이 하였다. 계모를 섬기는 데 한결같이 지성으로 하였다.

 족친 중에 빈궁하여 오갈 데 없는 이를 가엾게 여기어 구제해 주곤 하였다. 한 5촌 조카 되는 사람의 부부를 10년 가까이 데리고 있었는가 하면, 전답까지 넉넉히 주어 생계를 마련해 주셨다.

 또 조카 두 사람이 몹시 빈궁하자, 전답을 주어 경작하게 하였으므로 고향 마을에서 그의 친족에 대한 의리에 대해 탄복하였다. 효자 정문을 내리고 벼슬로 포상했다.

전엽 효자 전설 깃든,
감응한 호랑이가 파준 호천
 

한편 옥천 동이면 금암리 목시 마을 전엽 효자정문 큰길 아래에 호천(虎泉)으로 불리는 전설이 깃든 호랑이샘물이 있다. 

 예부터 호천과 전엽 효자와의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전엽 효자는 지극 정성을 다해 아버지 장례를 마치고 묘 옆에 여막을 짓고 3년간 시묘 살이했다 한다.

 매달 초하루와 삭망에는 반드시 삭망 차례를 올렸는데 그때마다 느닷없이 꿩이 날아와 떨어져서 그 꿩고기로 제물을 마련하였다. 3년간 시묘살이를 마치는 날, 큰 호랑이가 묘소 앞에 꿇어앉아 있어 깜짝 놀랐다.

 그러나 차분히 호랑이가 향하는 산 아래로 따라갔더니, 효자문 밖 길 아래 논 위편 어덕을 발톱으로 마구 파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곳을 조금 파헤치니, 그곳에서 시원한 샘물이 콸콸 솟아났다. 이에 이 마을 사람들은 전엽 효자의 선친에 대한 지극한 효성이 호랑이 산짐승도 감응시켜 이곳 샘물을 점지해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 이 호천 샘물은 이곳을 오가는 나그네들에게 갈증을 식혀 주는 샘물이었다.

지극한 전엽 효자 포상과 정문  

 1566년(명종 1년) 정월에 효성이 지극한 생원 전엽 등을 포상하고 효자 정문을 내렸다.

 옥천의 생원 전엽(全燁)은 사람을 성심으로 대접하고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겼다. 그의 아비인 목사 전팽령(全彭齡)이 벼슬에서 물러난 뒤로 빈궁하여 끼니도 자주 어려워지자, 전엽이 힘을 다해 봉양하여 맛있는 음식을 적극 마련하였고 그 음식이 남으면 반드시 아비가 주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주고자 하였다.

늘 어버이의 슬하를 떠나지 않고 항상 옆에서 모시고 벼슬살이에는 뜻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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