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 청성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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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 청성에 대한 단상
  • 김대현 수필가
  • 승인 2023.05.11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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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은 나의 화두다. 청산 남쪽 보청천가 구자산 아래가 내가 태어난 곳이다. 내가 고교 시절 ‘청산별곡’을 배운 후부터는 내 고향 청산에 대한 애착이 가기 시작했다. 이제 나이가 지천명이고 보니 더욱 그렇다. 그래서 그런지 시간만 나면, 고향 산하를 누비고 다닌 지 언 15년이 되었나 보다. 청산은 나의 문학의 본산이다. 그래서 이곳에서 시 문학에도 눈뜨기 시작했다.

청산이란 이름은 고려 때 명명되었는데, 신라 때에는 ‘굴산’ ‘기산’ ‘돌산’이라 기록되어 있다. 고려 현종 9년(1018)에는 경산도 상주 목에 속해 있었는데, 1914년 청산 남쪽(신라 때 성-기성토성, 지점석성)을 청성이라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청산은 서쪽으로 옥천, 동쪽으로는 경북 상주 모서, 북쪽으로는 보은, 남쪽으로는 청성이다.

청산면 면적은 약 77제곱킬로미터로 인구는 4,000여 명이다. 청산은 예부터 산자수려하고,  강물이 맑고, 옥천의 곡창지대로 보청천을 끼고 있는 분지로, 감, 대추, 포도, 담배, 인삼 생산지로 유명하다. 청산은 옛날에는 덕의산(543미터), 도덕봉 아래 백운정(이조 세종, 1460. 김수 운이 지음)이 있어, 경향 각지의 시인, 묵객들이 이곳에서 청산을 바라보며 음풍농월했다 한다. 청산은 보은 속리산에서 청산까지에 이르는 보청천이 꽃뱀같이 흘러, 하얀 백사장 버드나무 미루나무 강가에는 피라미, 메기, 쏘가리, 모래마주, 붕어, 조개, 올갱이 등등 수많은 물고기들이 헤엄쳐 노닐고, 봄이면 이곳에서 천렵도 하고, 여름이면 피서객 강태공들이 몰려들었다 한다. 그래서, 지금은 생선국수로 알려져 있다. 7보단장은 예곡보, 판수보, 범딩이보, 장위리보, 새들보, 청성보, 아님이보 7개로 농토수로답에는 가을이면 황금물결이 출렁거렸다.

또한 5일마다 벌어지는 청산 장날은 보은, 상주, 영동 등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한판의 농촌의 축제의 장이기도 했다. 특히 우시장은 유명했다. 청산 강가에는 물레방아가 있어 노래까지 불러졌던 낭만도 있었다. 청산 삼방리 장노골 앞산 천금산 골짜기에서 약 2킬로미터 올라가면, 청량사 절터와 일출암 터가 있는데 이조 때는 꽤 큰 절로, 지금도 가물 때에는 이곳에서 기우제를 드린다고 한다.

청성은 신라와 백제의 격전지로 아직까지 석성과 토성이 남아있는 문화유적의 보고이다. 청성면은 경부고속도로 금강유원지 아래 강 합금리까지로, 옥천군에서 가장 면적이 크고, 인구는 약 2,800이다. 특히 물이 좋다는 삼남리 게르마늄 생수와 장수리 ‘장수천(오아시스)’은 故 노무현 대통령이 관여된 곳으로 신문지상에 크게 보도된 바 있다. 장수천에서 조금 내려가면 강 옆 기암절벽이 있는데, 이를 화암(꽃 바위)라고 하여 대동여지도에도 나올 만큼 절경으로 아마 이곳이 '청산별곡'의 현장이라고 추측도 해 본다. 청산 8경으로 나는 이렇게 본다. 화암명월, 백운귀학, 학정어화, 죽포청풍, 갈령비폭이리라.

기성토성과 지점석성을 보축성하고, 청산부터 합급리까지 보청천 강둑을 푸른 잔디로 조성하고, 강물가의 백사장을 복원하고, 버드나무와 미루나무를 심어, 유원지로 만들고, 청산 숭의산 중턱에는 백운정을 복원하고, 청산 강가에는 물레방아도 복원하여 이름 그대로 청산 낙원을 만들 먼 훗날을 생각해 본다. 그리고 구지서당에는 대안학교와 박물관을 세워 인재를 육성하고, 꽃바위 부근에는 동물원과 야생초 농원으로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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