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관 정립 선생, 불굴의지 62세 과거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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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관 정립 선생, 불굴의지 62세 과거합격
  • 전순표 시인 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 승인 2023.08.03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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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관 고암 정립 선생은 조선 중기인 1554년(명종 9년)에 충청북도 옥천군 동이면 적하리에서 태어나서 1640년(인조 18년)까지 87세를 살았다. 그는 평소 학문과 덕행을 쌓고 강직한 숭현 의식 갖춘 성리학자이며 청렴한 목민관으로 후세에 귀감이 되는 옥천의 큰 인물이다.

 정립 선생은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도전정신으로 환갑을 넘긴 나이인 62세인 1615년(광해군 7년)에 문과에 급제, 80세에 이르기까지 성균관 전적, 진해현감, 군자감정, 판사 등을 지낸 목민관으로 위정자가 갖춰야할 유교적 가치를 닦고 실천한 성리학자이다.

 그의 본관은 하동 정씨이고, 이름은 처음에 정방(鄭霶)이었다 1582년(선조 15년)에 이조 예문관의 허가를 받아서 정립(鄭雴)으로 개명, 자는 군흡, 호는 고암이다. 아버지 동강 정유건은 선조 때 학행으로 상운찰방에 임명되었다. 호는 동강이다. 어머니는 옥천 전씨로 상주목사를 지낸 송정 전팽령 선생의 딸이다.

11세 청산 동당시 합격한 수재
 
그는 어린 시절부터 빼어난 수재로 6세에 문장을 짓고, 8세에 독서하며 대의에 통했다 한다. 그는 11세인 1564년(명종 19) 3월 충청도 청산현 동당시에 응시, 합격하며 주위를 놀라게 했고 26세인 1579년(선조 12년)에 시와 부로써 모두 진사에 합격했다. 청년기에는 5문장(五文章) 중에 한 사람으로 꼽혔다. 

임진왜란, 정묘호란 의병참전
 
38세인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중봉 조헌 의병장의 참모로 참전하였고 중봉 선생 사후에는 동천 이충범 의병장 의병진에서 형 정주와 함께 한 마음으로 옥천 쌍봉서원에서 의병을 창의하여 군량을 공급하는 일을 담당했다. 

73세인 1627년 정묘호란 때는 김장생 의병장 휘하에서 도유사와 소모관으로 의병에 참가하였다. 그 외에도 정묘호란 때 동궁인 소현 세자를 호위하기 위해 전주까지 간 일 등은 그는 국가가 전쟁으로 위기에 처할 때 마다 주저 없이 의병에 참전하고 충의를 실천했다.

 52세인 1605년(선조 38년)에 성균관에 있을 때 정인홍을 탄핵하는 통문을 지었다. 당시 성균관 문사들과 벼슬아치들은 모두 그 논박의 쾌활함을 칭송했고, 암송하며 탄복하며 칭찬하였고 남쪽 지방의 대가들은 모두 명작이라고 칭송했다 한다. 

애민실천, 청빈한 목민관 진해현감

 62세인 1615년(광해군 7년)에 마침내 대과에 합격하였고 63세인 1616년(광해군 8년)에 병조좌랑을 지냈고, 1617년(광해군 8년)에 진해현감으로 나갔다. 대개 전란 이후에 전후 복사업을 실시하기 위해 특별히 애민정신이 투철한 문관을 선발했기 때문이다. 

진해현감을 마치고 돌아갈 때 가마 안에 설치한 털자리를 보고 이것은 관물이니 즉시 돌려보내라 하였다. 현감 재직할 당시 청빈한 목민관으로 백성들을 잘 보살피는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진해 백성들이 비석을 세워 그의 공덕을 기렸다. 70세인 1623년(인조 1년)에 경상도 도사, 인조 9년에 정4품 성균관 사예로 승진하였고, 79세인 1632년에 정3품인 국방차관보 격인 군수물자를 관리하는 군자감정에 승진했다. 79세에 판사직을 끝으로 관직을 마쳤다.

낙향 숭현사업, 과세탕감, 민원해결 
 
금강이 흐르는 옥천군 동이면 고향 적하리로 낙향, 삼락재에서 후학을 가르치고‘삼계서원 위전 찾기’등 옥천의 김문기, 남수문, 전팽령, 곽은, 조헌 선생 등 옥천이 배출한 훌륭한 유현들의 숭현 사업에도 앞장섰다.

 그리고 옥천 백성들의 과도한 토지세의 과세 탕감과 각종 어려운 민원을 해결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정립 선생은 옥천지방 선비를 천거하였고, 충신, 효자, 열녀를 조정에 추천하여 정려되도록 관찰사, 군수, 어사, 관련 조정 부서 등에게 친히 서신을 해결해 준 목민관이다. 84세인 1637년(인조 15년)에 이경엄이 그의 선친과 함께 급제하였기 때문에 정립 선생을 위하여 옥천 증약역 우정에서 축하연을 베풀어 주며 존경심을 표하였다.

 87세에 고암 정립 선생은 옥천 동이면 적하리 삼락재에서 생을 마쳤다. 그의 죽음에 대해 사림에서는 매우 슬퍼하였고 살아생전 그의 숭현의식과 충의정신를 흠모하였다. 

그는 임진왜란과 정묘, 병자호란 기에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할 때마다 주저함 없이 충의와 보국에 몸을 던진 훌륭한 성리학자였고 포기하지 않는 도전정신과 청백한 목민관으로서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큰 귀감이 된다.

 한편 임진왜란 전후 난중일기인 고암기와 정립 개명첩, 교지, 교첩 ≪정립 문적≫ 4점은 2020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404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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