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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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
  • 옥천향수신문
  • 승인 2023.08.24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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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배양하는데는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욕심을 버리면 안되는 일이 거의 없으며 있다손 치더라도 극히 적을 것이다”(맹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성경 야고보서 1장 15절)

“과도한 욕심은 많은 고통을 부르는 나팔이다”(팔만대장경)

위의 말들은 모두가 ‘욕심’에 관한 명언들이다. 이러한 말들은 수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유효하며 어쩌면 인류가 사라지는 그날까지 진리로 자리매김 할 것이다.

국립국어원이 발행하는 표준국어대사전에 보면 ‘분수에 넘치게 무엇을 탐내거나 누리고자 하는 마음’을 욕심(慾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욕심이 동물에게도 있을까, 모르긴해도 이러한 현상은 인간에게만 나타나는 특별한 현상은 아닐까. 동물들의 경우 일단 배가 부르면 더 이상 배를 채우려 하지 않는다. 밀림의 왕 사자도 배가 부르면 바로 코 앞에 지나가는 얼룩말도 빤히 바라만 보고 있다. 인간처럼 내일을 위해 쌓질 않는다. 배가 고프면 그때그때 먹을만큼의 사냥을 할 뿐 인간처럼 닥치는대로 사냥을 빼앗거나 모아두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은 다르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는다. 아니다. 사실은 배가 부르는데도 내일을 위해 최대한 쌓아 둔다.(썩어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남으면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먹으면 좋을텐데 그럴줄을 모른다. 배가 불러도 내일을 위해 남의 것마저 기꺼이 빼앗으려 든다. 이 과정에서 사람 목숨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특히 특히 이러한 현상은 살만한 사람들에게서 더 심하게 나타난다. 그들에게서 자비나 아량이란 단어는 한낱 사치스런 수식어에 불과하다. 그저 자신들의 호주머니만 채우면 만사OK다. 그래놓고도 대중들 앞에서는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자”고 한다. 참으로 가증스럽고 불쾌하기 짝이 없다.

왜 그럴까, 꼭 그렇게 해야만 성에 찰까. 오래전 ‘해바라기’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교도소에서 나온 주인공이 찾아간 곳은 자신의 아들을 죽인 엄마의 집. 그 엄마는 이 살인범을 아들로 삼았다. 손양원 목사가 그랬던 것처럼. 그래서 찾아간 것이다.

문제는 주인공 엄마가 운영하는 해바라기 식당을 빼앗으려는 건설업자를 상대로 주인공이 참교육을 시키는게 핵심 포인트다. 가능하면 착하고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주인공에게 건설업자는 동네 양아치들을 시켜 해바라기 식당을 빼앗고자 온갖 흉악한 짓을 일삼는다. 심지어 자신을 양아들로 삼아준 엄마까지도 죽이고 만다. 결국 참다 못한 주인공은 건설업자가 새로 지은 나이트클럽 준공 기념 차 그곳에 모인 동네 양아치들을 모조리 두들겨 패고 종국에는 불을 질러 버리고 만다. 참교육에 들어가기 전 주인공은 이런 말을 한다.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는 거란다” “꼭 그렇게 다 가져가야만 속이 후련했냐”.

사실 건설업자도 욕심을 조금만 내려 놓았으면 죽음이라는 단어와 맞닥뜨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끝간데 없는 욕심 때문에 나이트클럽 개장도 못하고 저승행이 되고 말았으니 이 얼마나 미련하고 한심스런 일인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다. ‘넘침은 부족함만 못하다’라는 의미다. 뭐든지 적당히가 좋다. 하나를 더 취하려다 있는 것마저 빼앗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놈의 ‘욕심’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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