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산성 전투의 전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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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산성 전투의 전개(5)
  • 이주우 옥천향토사 연구회 회원
  • 승인 2023.10.12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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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덕왕의 관산성 재점령 및 영동 공격-4

551년의 전투사항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나 신라본기에는 신라가 고구려를 공격하여 10성을 빼앗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사기 열전 거칠부에 신라가 백제와 협력하여 고구려를 공격했고, 백제는 먼저 고구려의 평양을 격파하였고, 거칠부는 승세를 몰아 죽령 이북 고현 이내의 10개 군을 빼앗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일본서기에는 성왕이 백제와 신라, 임라(가야)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고구려)를 정벌하여 한성 및 평양을 토벌하여 옛 땅 6군을 회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이 시기 신라가 541년의 맹약을 배신한 행위를 숨기기 위해 백제의 평양 격파를 본기에서 빼버렸고, 거칠부의 10고을 탈취를 누구와 싸운 결과임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백제가 먼저 평양을 공격해 깨뜨렸다.(百濟先攻破平壞)”고 한 일곱 자가 우연히 남아 있어서 이것이 거칠부전(居柒夫傳) 에 게재되어 그 일을 후세에 분명히 밝히게 되었다.‘ 라고 기술하면서 김부식의 역사왜곡을 비판하였다.

일본서기 흠명천황 13년 552년 5월 무진(戊辰) 초하루 을해(乙亥)  백제‧가라‧안라(百濟‧加羅‧安羅)가 중부(中部) 덕솔(德率) 목리금돈(木리今敦) ‧ 하내부(河內部) 아사비다(阿斯比多) 등을 보내어 “고려(高麗)가 신라(新羅)와 화친하고 세력을 합쳐 신의 나라와 임나(任那)를 멸하려고 도모합니다.

일본서기 흠명천황 13년 552년 이 해(553년?) 百濟가 漢城과 平壤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新羅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新羅의 우두방(牛頭方)·니미방(尼彌方)이다(지명은 자세하지 않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31년 553년 가을 7월, 신라가 동북 변경을 빼앗아 신주를 설치하였다. 겨울 10월, 왕의 딸이 신라에 시집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4년 553년 가을 7월, 백제의 동북 변경을 빼앗아 신주를 설치하였다. 아찬 무력을 그 곳의 군주로 임명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백제의 왕녀를 맞아 소비로 삼았다.

삼국유사 진흥왕편에서 ’승성 3년(553년) 9월에 백제의 조사가 진성을 침범하여 남녀 3만9천명과 말 3천 필을 빼앗아 갔다. 이보다 먼저 백제가 신라와 군사를 합하여 고구려를 치자고 하니 진흥왕이 말하기를 "나라가 흥하고 망함은 하늘에 달있으니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 어찌 고구려의 멸망을 바라겠느냐." 하고 말했다. 그리고 이 말을 고구려에 전하니 고구려는 이 말에 감동이 되어서 신라와 평화롭게 지냈다. 

이 때문에 백제가 신라를 원망하여 침범을 한 것이다.‘ 

이는 신채호 선생님이 언급했듯이 551년 신라가 백제를 도왔다면 고구려는 멸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 중 한쪽이 너무 강해지면 신라에게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지난 약 150년간의 역사 속에서 알았기 때문에 진흥왕이 삼국유사에서 표현되었듯이 진흥왕이 말하기를 "나라가 흥하고 망함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 어찌 고구려의 멸망을 바라겠느냐."로 백제의 독주를 견제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백제는 501년 탄현에 목책을 세우고 신라를 대비한 이후도 고구려와 전쟁을 계속해왔고, 따라서 신라와의 나제동맹의 재기를 바라면서, 525년에 화친 시도 및 541년 화친으로 다시 나제동맹으로 고구려 대응에서 협력이 되었는데, 신라가 실속을 차리는 것을 알았어도 참았을 것이다. 

551년, 일본서기에는 성왕이 몸소, 가야와 신라군을 거느리고 한성과 평양을 공격을 하였으나, 신라가 백제와 같이 평양까지 공격할 줄 알았는데, 한강상류지역을 점령하는 것으로, 힘 안들이고 영토를 확대 만하는 행위를 하였다. 

백제는 이것에 대한 배신감도 있었을 것이고, 일본서기에 의거하면 552년 고려(고구려)와 신라가 화친을 하였다는 정보에 기초하여 고려(고구려)와 신라의 협공을 대비하여 평양과 한성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성왕 31년 553년 10월에 백제의 왕녀을 진흥왕에 시집을 보낸 것은, 신라와의 나제동맹의 지속 바라면서 동시에 김주성 교수가 언급했듯이 신라의 고급정보를 얻으려는 기대한 것으로 보이는데, 관산성 전투에 대한 정보보다는 신라가 나제동맹을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결과적으로 백제는 신라와 541년 화친을 하면서 나제동맹으로 고구려와 같이 대응하기로 하였는데, 신라가 나제동맹의 의지가 보이지 않으므로, 그간의 모든 일을 배신으로 생각하여 신라를 공격한 것이 관산성전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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