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묘순 작가 정지용 시인의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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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묘순 작가 정지용 시인의 기행
  • 김묘순 충북도립대 겸임교수
  • 승인 2023.10.19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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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밀려서 1등 
 「해협병(海峽病)(1)」은 미련보다 후련함을 앞세우고 

 제주도를 가기 위해 정지용은 밤 9시 반 배를 탔다고 했다. 김영랑, 김현구, 정지용 이렇게 셋이서 동행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두 아들과 남편 이렇게 넷이서 동행하였다. 

 우리는 오전 9시 씨스타크루즈를 탔다. 승객을 부르는 방송이 나온다. 지금까지 잠든 줄만 알았던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우르르 개표구로 향한다. 그 모습은 스크린에서 볼 수 있었던 6·25 한국전쟁 후 밀가루 배급을 받던 영상과 같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일어설 기운이 영 개운치 않다. 일부러 뭉그적거리며 시간을 벌었다. 아들에게 좀 더 앉아있다 가자고 제의를 한다. 그러자고 착한 대답을 해준다. 고마운 일이다.

 천성이 게으른 나는 누구 앞에 나서는 것이 똑똑하지 않다. 자꾸만 뒷걸음질을 놓다 누군가 떠다밀어 놓으면 맨 앞에 설 때가 더러 있다. 그 자리는 모두들 앉기 싫은 자리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럴 때는 앞으로 밀려드는 것을 멈추고 주춤거리는 나를 거세게 밀쳐 놓는다. 우물거리다 맨 앞의 선두가 돼 버렸을 때의 당황스러움은 예상치 못한 화살을 맞았을 때와 흡사하다. 

  5년 전 (사)한국문인협회 옥천지부장이 맡겨졌을 때의 당혹스러움을 지금도 기억한다. 협회장으로 추대를 당한 것을 안 순간 번뜩 스쳐간 것은 도망갈 궁리였다. 그 궁리를 만족시켜준 것은 총회에 참석한 회원의 정족수가 충족되지 못하였다는 것이었다. 

  ‘정족수가 충원되지 않아 이 회의는 무효’라며 옷에 붙은 먼지 털듯 탈탈 털고 도망 나왔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그 기억 속으로 미소가 번진다. 후에 정족수를 채우고 나서 회장의 임무를 맡을 수밖에 없었다. 지난 일이지만 지금 생각해도 주춤거리다 1등이 되어버렸던 웃지 못할 이야기다. 

  크루즈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543호실을 찾았다. 40~50여명은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바닥이 차갑다. 그냥 앉아있기도 서있기도 어렵다. 선내에 비치된 구명조끼를 꺼내 깔고 앉았다. 그냥 견딜만하였다. 그러나 선내 방송이 나온다. 구명조끼를 제자리에 두란다. 우리는 구명조끼를 정리해 제자리에 놓을 밖에 없다. 얌전히 정리해 놓을 밖에.

 이제, 밀려서 1등이 되었던 지부장의 임기를 재임까지 마쳤다. 

 나의 임무도 얌전히 정리하였다. 마치 집을 떠날 때의 즐거움처럼, 소임을 마치고 돌아설 때 미련보다 후련함이 앞섰다. 

 떠나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이 홀가분함과 후련함을. 집 떠나는 즐거움은 마치 집을 찾아드는 행복감과 같은 것을.

9. 어설픈 기우(杞憂)
「해협병(海峽病)(2)」는 푸른 쉼표 하나 하늘 끝에 매다는 

정지용과 나는 견우직녀 같다.

 정지용은 밤배를 타 거뭇거뭇한 섬들을 보며 이 길을 지났다. 나는 낮배를 타고 이 길을 지난다. 섬들이 파도 속에 숨었다 얼굴을 내민다. 바다는 여전히 바람이 심한가 보다. 파도의 움직임이 허리를 기우뚱거린다. 

  선실 사람들이 한무리 밖으로 나간다. 갑판에서 시원한 바람을 쐴 모양새다. 그러나 으실으실 떨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밖으로 나갔던 사람들이 이내 선실 안으로 들어온다. 손에 음료수만 하나씩 쥐고 들어와 제자리에 앉는다. 나는 춥냐고 묻지 않기로 하였다. 추운 표정이 얼굴 가득히 묻어있기 때문이다.

선실 안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 가족 단위로 관광을 가는 모양이다. 

  할머니, 중년 부부, 중고등 학생이나 대학생으로 보이는 이들이 많다. 화목해 보인다. 누워서 잠든 가족을 위해 옷가지로 덮어주며 추위를 쫓아내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 

  우리 가족도 옷가지를 덮고 누워있다. 우리도 저들처럼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하고 있는 무리 중 하나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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