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묘순 작가 정지용 시인의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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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묘순 작가 정지용 시인의 기행
  • 김묘순 충북도립대 겸임교수
  • 승인 2023.10.26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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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어설픈 기우(杞憂)
「해협병(海峽病)(2)」는 푸른 쉼표 하나 하늘 끝에 매다는 

큰아들이 나의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뜨고 웃어준다. 손을 잡고 편의점으로 갔다. 편의점 옆 파리바게트는 빵이 품절되었단다. 승객들이 배가 많이 고프거나 심심한 모양이다. 특이한 물병에 담긴 물과 주스와 과자를 사서 돌아왔다. 과자를 먹는 소리가 바스락거린다.

  사람들이 하나 둘 눈을 뜬다. 

  나는 소리와 먹을 것과 사람들 사이에서 고민을 하였다. 바스락 소리에 사람들의 잠이 깨면 어찌할까? 그러나 미리들 잠을 깨줘서 고맙다. 

  추자도를 지난다. 

  우리는 멀미 없이 추자도를 지나 바다를 건넌다. 멀미약을 사서 먹어야 하는지에 대한 걱정은 여전히 기우(杞憂)에 불과했다.

  사람은 때로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을 한 짐씩 지고 무거워한다. 오지도 않은 걱정을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잠 못 들기도 한다. 나도 사람인지라 배멀미를 걱정하고 바스락거리는 과자 먹는 소리를 걱정하였다. 그러나 그 걱정은 나에게 오지 않았다. 고맙다. 

  키가 훤칠한 감나무는 아직도 여름을 입에 문 까치밥을 매달고 있다. 까치밥은 서리를 추스릴 틈이 없어 붉었던가? 귀가가 늦어져 서두르는 달 사이로 나의 주름살이 밀리고 있다. 늘 환한 등불만 켜 놓을 수 없는 인생이지만 감정을 묶은 책 한 다발 누군가에게 불쑥 내밀고 싶어진다.

  나는 지금 맥없이 놀기만 하기에는 너무 젊고 꿈 없이 지내기엔 어설픈, 지천명 고개를 넘고 있다. 늙었다. 아니 젊었다. 그래서 마음의 빗장을 힘껏 풀어 헤쳤다. 그 빗장으로 투명한 생각들을 정리한다. 아주 오래전 연필에 침을 발라 꾹꾹 종이가 찢어지도록 글을 썼던 기억들. 그 기억들이 그리워진다. 나는 이제 정성을 다해 잠시라도 머리에 머물다간 생각들을 그려내려 한다.  

  안으로 균열과 금이 생겨 수없이 뜨고 졌을 언어들을 모아 밤새도록 커서를 또각거린다. 나는 내가 만든 글귀에서 싸라기 눈발을 맞기도 한다. 때론 온전히 그 글들을 발가벗겨 폭풍의 언덕으로 내밀기도 한다. 모진 회초리를 들어 만든 수없이 많은 언어들과 마주쳤을 때의 두려움과 상면하는 밤이 있다. 그런 밤이면 한 움큼의 글을 쥐고 세상과 마주서 본다. 결코 만만치 않은 길이다.

  이것은 반복이다. 아주 지루한 반복이다. 그래도 한 발 더 내디뎌 보면 푸른 쉼표 하나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하늘 끝에 매달아 본다. 그 희망의 등에 살짝 업혀 풀밭을 서성인다. 나는 문득 쳐다본 하늘이 그리워 고운 시를 마당 가득 부어 놓는다.

  글이 되지 않는다고 하늘에 돌팔매질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렇게 시가 써지지 않는 건 비 내리는 창문 밖에 맨몸으로 서있어 본 적이 없어서다. 이렇게 잠이 오지 않는 건 달갑지 않은 오늘을 보내서다. 또 이렇게 여러 줄 글을 늘어놓는 건 다시 내일 아침이 오기 때문이리라. 

  배는 해를 안고 바다 위를 구른다. 제주도에 도착하였다는 안내 방송은 아직 없다.

10. 정지용의 시론(時論)과 나와 아들 
지워도 표시나지 않는다는 「실적도(失籍島)」를 지나며

  추자도는 지도에서도 슬쩍 지워도 표시가 나지 않는다하였다. 선생님이 돋뵈기를 쓰고 검사해야 겨우 발견할 수 있다하였다. 녹두알 만한 이 섬은 소학교(초등학교) 시험에도 건너 뛴다하였다. 그러나 추자도는 새벽에 샛별같이 또렷하다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정지용은 새벽에 이 추자도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도 바람이 불었다한다. 갑판 위에 있던 사람들도 잠이 들었다한다.

  샛별같이 빛나는 추자도를 고무(지우개)로 지워버린 이성에게 꾸지람을 듣겠다하였다. 그러나 어린 학우들의 행방과 이름을 까마득히 잊었으나 추자도라는 이름을 이때까지 지니고 왔다하였다. 그러니 전생에 적지 않은 연분이 있었던 모양이라고 하였다. 정지용 선생님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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