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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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도시
  • 박미련 작가
  • 승인 2023.10.26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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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감각 제로, 낯선 곳에 가면 그곳의 길은 임자를 만난듯 나를 놀린다. 

찾던 길은 꼭꼭 숨어 도무지 나타날 기미가없다. 갈 길은 멀어 속이 타는데 혼자 숨바꼭질이 재밌는 모양이다.

그날도 숨은 길을 찾아 헤매다가 얼마 못 가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해거름이 지나니 주변에는 집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하나둘 불을 밝혔다. 온화한 불빛이 나를 향해 조용히 쏘아대었다. 기다리는 이가 있는 그곳에 닿지 못하는 나의 현재만 도드라졌다. 그와 나의 거리가 더욱 멀어지는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자주 그곳에 있었는데 그곳은 한 번도 가보지못한 별세계 같았다.

사방이 길인데 나를 위해 선뜻 내어주지 않는 길이 이렇게 미울 수가 없다. 길을 탓하고, 둔한 자신을 미워하는 중인데 시간은 무심히 제 길을 간다. 이제 더한 어둠이 밀려올 텐데 기다려주지 않는 시간이 서럽다. 더한 절망이다.

잃어버린 길 때문에 서성인 지도 꽤 오래되었다. 접어든 길이 잘못된 것 같아 뒤돌아보기도 많이 했다. ‘다시 수습할걸.’뒤늦은 후회가 밀려온다. 승산 없는 일에 주사위를 던지고 있는 것 같아 모든 걸 처음으로 되돌리고 싶기도 하다. 그럴수록 소리 없는 아우성이 귓가에 울린다. 너를 떠나 난 어떻게 살라는 거냐고 집요하게 되묻는다. 처음 발을 들여놓은 그날을 떠올려본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서 아무리 위로 해도 내 서러움을 담아내지 못했다. 아이를 가지면서 알게 된 지병이 말썽이었다.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가슴 졸이며 기다리다가 분만하고 한 달이 채 되기도 전에 수술실에 누웠다. 갑상선암, 수술의 부작용으로 온몸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눈만 뜨면 커다란 돌덩이가 가슴을 짓눌렀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의식하지 않고도 잘만 쉬던 숨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 되었다. 일 분이 천 년 같았다. 차라리 숨을 쉬지 않아도 되는 영원의 세상으로 데려가 주기를 바랐다. 엄마도 남편도 애타는 마음으로 지켜보지만, 누구도 가슴에 있는 돌덩이를 치워주지 못했다. 아픔은 고스란히 혼자 감당해야 할 내 몫이었다. 

세월 따라 나약한 마음은 잦아들고 홀로 버틸 수 있는 뿌리가 조금씩 자라기 시작했다. 지금은 어려운 시기이니 잠시불어닥친 바람이라 생각하는 여유도 갖게 되었다. 

덕분에 어렵게 내린 뿌리는 아픔을 자양분 삼아 하루가 다르게 단단해 졌다. 살면서 그날의 고통은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는 열쇠가 되었다.

삶은 일인극임을 그때 알았다. 엄마의 손길조차 닿지 않는 무원의 공간에서 홀로 싸워야 하는 게 삶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그들의 손을 빌릴 수 없다면 구차한 얘기는 접어두기로 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는 밝은 얘기만 나누려 애썼다. 

그럴수록 속에는 풀지 못한 응어리가 하나둘 생겨났다. 누군가에게 나의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었다. 비우고 싶었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투병 일기를 쓰면서 한결 후련한 기분을 느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나도 모르게 글의 매력에 풍덩빠져버렸다. 살면서 급한 것부터 해결하느라 멀리 마실을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그를 떠나보낸 적은 한 번도 없다. 엉뚱한 일로 용을 쓰고,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잊은 듯 살았어도 그는 늘 내 곁에 두었다. 다듬고 자주 쓰다듬어주지는 못했지만, 고이 모셔둔 꿀단지 처럼 손만 뻗으면 가질 수 있는 내 것이라 생각 했다. 오냐오냐하고 달려와 줄 절친이라 여겼다.

이제 다시 그를 찾고 싶은데 그는 나를 외면하고 있다. 내가 알던 그가 아니다. 가장 빛나는 모습으로 숨 가쁘게 달려 오곤 하였는데 너무 오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낯선 도시 에서 이정표 없이 찾아 헤매던 숨은 길처럼 야속하다. 어쩌다 얼굴을 내밀 때도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에게 가는 길이 이리도 멀고 험난한 줄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다시 숨고르기를 한다. 찬찬히 지나온 길을 되짚어본다. 내가 서 있는 이곳이 출발점이다. ‘그래 맞아. 이쯤에 커다란 카페가 있었는데.’ 방향감각은 없어도 기억력은 살아 있다. 건물의 위치를 보며 길을 찾는 나만의 방법이 있었지. 원시적이라 조롱해도 할 수 없다. 그에게 가는 길이 그것이라면 난 기꺼이 그 길을 붙들리라. 행색이 변했다고 당황하지 말자. 그가 오는 길에 난 거친 풀을 뽑고 모난 돌을 걷어내는 데 집중하리라. 언젠가는 사랑하는 이가 불 밝히고 기다리고 있을 그곳이 발아래 있을 테지. 그러면 난 먼저 그를 붙잡고 엉엉 울어버릴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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