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 선각자 육용정 저술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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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선각자 육용정 저술가(1)
  • 전순표 옥천향토전시관장
  • 승인 2023.11.02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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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엽 성리학자, 저술가 
 
의전 육용정(陸用鼎)은 1843년(헌종 9년) 충청도 청산현 서면 두릉리(현 옥천군 청성면 두릉리)에서 태어나서 1917년에 생을 마친 조선 말기 성리학자이며 신소설가이다. 초명은 육재곤(육(陸)在坤)이고 자는 치우(致禹)이며 호는 의전(宜田)으로 본관은 옥천 육씨(沃川陸氏) 이다. 그는 조선 후기 성리학자인 이병선과 고산 임헌회(任憲晦) 선생의 문인이다.

육병규(陸炳奎)와 성산이씨의 장남으로 태어났고 큰아버지 육병하(陸炳夏)에게 양자로 입양되었다. 1894년(고종 31년) 휘경원 참봉을 지냈다. 충청도 청산현 청서면 두릉리(현 충청북도옥천군 청성면)는 그의 종중인 옥천육씨 목사공파 선조들이 대대로 세거한 곳으로 조선 전기 문신인 육한(陸閑) 제주 목사를 중시조로 한다. 육용정의 어릴 때 이름은 재곤이고 후에 용정(用鼎)이라 개명하였다. 육용정 참봉은 자식이 없어 그의 동생 육용필 진사의 5남매 중 장남인 육종윤(陸鍾允)을 양자로 들였다.

김옥균과 갑신정변 후 복권  
양자 육종윤 외부 교섭통상사무

육용정은 갑신정변에 참여한 개화파 육종윤의 양아버지이며 육종윤의 아들 육정수는 대한제국시대인 1900년대 신소설가로 하와이 이민사를 다룬 『송뢰금』과 중국 번안소설이 다수 있다. 육용정의 양자 육종윤(陸鍾允)은 1884년(고종 21년) 갑신정변에 가담하여 감옥에 갇히는 금고형을 받았고 1894년(고종 32년) 갑신정변 관련자들을 복권하면서 관직에 올라 서오릉 참봉, 외부 참의와 외부 교섭통상사무 등을 지냈다. 

1896년(건양 원년) 친일파 내각에 둘러싸인 경복궁에서 탈출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 이후 육용정은 관직을 단념하고 은거하면서 소설과 저술을 남겼다. 그는 당시 성리학자로서 개화파 사상에 긍정적이었고 전통적인 동양 정신은 지키면서 서양의 첨단 기술만을 받아들여 부국강병 하자는 사상을 지지하였다. 의전 육용정 선생이 회고하기를 친아버지 육병규는 “부친은 기의(氣義)를 숭상하고 통이 넓은 사람이었는데 독서는 즐겨하지 않았으며 대장부는 마땅히 후인들의 자기의 행적을 기록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어찌 고인의 전적(典籍)을 외우겠느냐”고 하였다. 또 “과거 시험은 애들 놀이이니 뜻 높은 자가 기웃거릴 데가 아니라” 하였으나, 자신의 뜻과 세상이 맞지 않아 불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마구 술 마시면서 스스로를 방기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를 ‘호걸이라 칭하였다’. 

생부 육병규는 심화(心火)가 목구멍에 걸려 39세에 죽고 말았는데, 일종의 화병으로 추정된다. 후일 육용정은 아버지가 남긴 초고들이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종이가 낡고 글자가 빠져 자세하지 않는데다가 불까지 나서 그나마 없어졌다며 안타까워하였다.

육용정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으며 소년 시절에 어머니 성산이씨(星山李氏)의 사촌인 외당숙 이병선 선생의 문하에서 25년간 수학하였다. 그리고 당대 노론계의 기호성리학자 고산 임헌회(任憲晦)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육종윤 박규수, 김윤식 문하 수학

의전 육용정 선생은 성인이 되어서 충청도 면천군(충남 당진시)에 이주하여 살다가, 한성부로 상경하여 살았다. 부인 능성구씨(綾城具氏)와 결혼하였으나, 아들이 없어 동생 육용필 진사의 장남 육종윤(陸鍾允)을 양자로 들였다.

양자 육종윤은 개화파 지식인 박규수와 유대치의 문인이며 온건 개화파로 김홍집 내각의 외부대신을 지낸 김윤식(金允植)의 문하에 보내 수학하게 하였다. 박규수(朴珪壽)가 후일 옥천군으로 유배를 오자, 육종윤은 김윤식의 문인으로 시문으로 교유하며 친분을 쌓았다. 후에 김윤식(金允植)은 그의 문집의 서문을 써주기도 하였다. 육용정은 김윤식과 김홍집 등의 온건 개혁파 인사들과 사귀면서 그들의 개화사상에 적극 공감하면서 동시에 유교의 성리학적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적 입장을 지지했다.

양부 육용정 선생의 개화기 지식인으로 이같이 양자를 그 당시 개화론을 적극 펼치던 박규수와 유대치 선생을 물론 김윤식의 문하에서 개화사상을 배우게 함으로써 옥천 출신으로 김옥균(金玉均) 선생이 갑신정변을 일으킬 때 동향인이자, 개화 물을 먹은 육종윤도 적극 참가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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