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 선각자 육용정 저술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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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선각자 육용정 저술가(2)
  • 전순표 옥천향토전시관장
  • 승인 2023.11.09 13: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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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실패 양자 육종윤 일본망명

 1884년(고종 21년) 12월 양자 육종윤(陸鍾允)이 갑신정변에 참여했다가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하자, 연좌제에 의해 감옥에 갇혀 금고형을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용정(陸用鼎) 선생은 그이 양자 육종윤과의 양자 관계를 끊지 않았다. 

한편 그는 갑신정변 이후 ‘해외에 유학을 가면 사람이 바뀌어 돌아온다‘면서 해외 유학을 가서는 안되는 이유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한동안 그는 충청도 청산현(현 옥천 청성면)으로 낙향해서 살다가, 1894년(고종 31년) 갑신정변 관련자들이 복권되면서 양아들 육종윤이 제중원 주사의 직위에 오르면서 육용정은 서오릉 참봉에 발탁되었다.

1894년(개국 503년) 그 해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하면서 낙향하여 살던 동네에 동학군이 횡행하여 재물을 빼앗고, 집을 불태우는 등 치안이 몹시 나빠서 충청도 청산현(현 옥천군 청성면)에서 다시 한성부로 이사하였다. 양아들 육종윤은 외부 참의교섭통상사무로 승진하였고 육용정은1895년(개국 504년) 5월에는 휘경원 수봉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육종윤은 1896년(건양 원년) 2월 고종께서 아관파천 당시 개화당 유길준, 박영효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때 육용정도 관직을 그만두고 한성부 부근의 자택에서 은둔하며 소설과 저술을 남겼다.

이후 현실에 좌절한 그는 김윤식(金允植) 등 일부 개화파 원로들과 교류하면서 시문과 소설, 저술 활동으로 소일하였다. 그밖에 김윤식, 어윤중, 윤웅렬, 정ㅇ교, 이건창, 황필수, 이건초등과 교유하며 시문을 주고받기도 하였다.

《의전기술》, 신소설 등 많은 저술 남겨                     

만년에 서울에 은거하면서 당대 지식인이었던 김택영, 윤웅렬, 김윤 등과 교유하였다. 

시집으로 <의전시고>가 있고 1912년에는 그간 저술되었던<의전시고>, <의전숙고>, <의전시고>, <의전기술> 등을 모아서 <의전합고>라는 책명으로 보성사에서 현대인쇄술로 출판, 간행하였다. 

특히 저서 중 <의전기술>은 사론(士論), 군신론(君臣論), 경세론(經世論), 심성론(心性論), 서양지식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그의 의견, 사상 등을 기술하였는데 구성이나 내용에서 잘 된 저술로 알려졌다.

또한 소설작품으로는 자신이 직접 돌아다니면서 만난 실화를 윤색한 실화소설인<군인처 모소사전>, <송소합전>, <개자이석주전>, <도자김동간전>, <이성선전>, <기몽>, <몽환진전>등을 남겼다. 「군인처 모소사전」은 동학농민전쟁에 참가한 남편의 시신을 거두고 종적을 감춘 과부의 이야기이고 「도자김동간전」은 백정인 김동간에 대한 실화소설이다. 그리고 중국의 한시인 사군곡(思君曲)을 번역하여 「상사별곡」이라 하였고「한성화류가」19수,「강상회인」12수,「석별곡(惜別曲)」6수 등의 詩도 남겼다.

의전 육용정 선생은 조선 말기부터 대한제국 시대인 근대 초기에 일탈적인 삶을 살았던 개인 인물들에 대한 일생을 묘사한 기록을 전(傳)이라는 전기소설(傳記小說)을 통해 상세히 남가기도 했다. 대표적 시는 <노처녀의 노래(老處女吟)>와 <남자의 답장(男子答詞)>가 있다. 

또한 동성애에 대한 언급이 금기시되던 그 당시 동성애자에 대한 기록도 짤막하게 언급하던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비교적 상세하게 동성애자들의 관계를 소설작품 속에 묘사하기도 하였다.

총독부 은사금과 직위 거절 옥천낙향
 
1910년(융희 4년) 10월 경술국치 직후 조선총독부에서 개화파 정치인들에게 돈과 직위를 주었지만, 모두 거절하고 고향인 충청도 청산(현 옥천군 청성면 두릉리)에 은거하면서 소설과 저서, 저술에 몰두하다가 1917년에 75년의 생을 마쳤다.

육용정 소설가는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컸다. 그래서 평소 “서양인들이 통상 교섭을 핑계로 기독교를 들여보내 사람들을 선동하려는 것이 목적이라고 봤다. 그는 《의전기술》 3권에서 ”서양인들이 교섭, 통상을 명목으로 삼지만, 실제로는 각국의 허실을 엿보아, 혹은 기독교를 들여보내 선동하기도 하고 혹은 반역자들을 유혹, 나라의 실정을 염탐하기도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한제국 시대에 내부 주사를 지낸 그의 양손자 육정수(陸定修)는 근대 여명기에 『혈의 누』를 지은 이인직 등과 함께 신소설가로 활동하였고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YMCA(기독교청년회) 간부로 활동하였고 육종윤의 조카는 육영수 여사이며 그의 부친 육종관은 막내 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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