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묘순 작가 정지용 시인의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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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묘순 작가 정지용 시인의 기행
  • 김묘순 충북도립대 겸임교수
  • 승인 2023.11.23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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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길진섭 화백과 여행을 떠나다

화문행각(畵文行脚)

1. 워드카 
「입빼이 오룡배(五龍背) 1」에 나타난 정지용의 발자취를 찾아

 만주 신시가(新市街) 육번통(六番通) 팔정목(八丁目)에 있는 삼종형님 댁에서 정지용은 잤다. 형님 댁은 아주머니가 없고 조카아이들과 형님이 살고 있다. 아주머니 없는 장롱은 빛이나 보이지 않는다. 설령 약과 기름으로 윤을 내도 쓸쓸한 빛이 돌지 싶다고 정지용은 서술하고 있다. 

  은행에 다니는 형님과 저녁에 와사난로를 피우고 통음(痛飮)을 하고 형님은 주정을 하고 정지용은 아래층으로 내려와 큰조카를 붙들고 운다. 성애가 겹겹이 쌓인 유리창 밖에서 만주 세납과 나발 소리가 들려온다. 만주 사람들은 죽거나 혼인(婚姻)할 때 세납을 분다. 세납 곡조를 경우에 따라 어떻게 구분하는지 정지용은 분간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역전 일만 호텔에서 정지용의 짐과 화구(畵具)를 지키며 잔 길진섭과 다음날 만났다. 정지용은 치과에 가는 셋째 조카와 마차를 타고 길진섭을 만나러 간다. 아이들은 털로 곰처럼 싸놓았다고 한다. 역시 만주는 추운 곳임이 실감난다. 

  빅토리아에서 커피를 마시며 정지용은 길진섭을 기다린다. 이들은 워드카를 마신다. 등이 훅 달도록 마시고 오룡배 가는 기차시간에 대려면 정거장까지 뛰어가야만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룡배에서 나는 빅토리아도 일만 호텔도 정지용의 삼종형님과 조카도 찾을 수 없었다. 

  2015년 9월. 19회 ‘연변 지용제’에 참석하였다.

  정지용의 문학 혼을 기리고 민족 정체성 구축과 한국어를 사용함으로 우리 민족의 얼을 이어가고자 시작한 ‘국제연변정지용백일장’이 4회를 맞이할 때였다.

  정지용의 발자취를 찾아 나섰다. 연변지용제도 참석하고 정지용이 기행 했던 곳도 따라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허사였다. 그때 정지용이 서술하였던 모습은 없었다. 지금은 만주도 오룡배도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1940년 동아일보에 기행문을 발표하고자 정지용은 길진섭과 함께 평양, 선천, 의주를 거쳐 오룡배까지 다녀갔다. 

  평양, 선천, 의주는 현재 내가 갈 수 있는 상황이 못 된다. 

  언젠가 통일이 된다면 들러보리라는 생각으로 오룡배에 도착하였다. 오룡배는 고층 아파트와 온천이 발달되어 있었다. 호텔에서 점심을 먹고 수영복을 입고 노천 온천으로 향했다. 애초에 수영복을 준비해가지 않았던 나는 호텔 온천에서 머물려고 하였다. 그런데 ‘지용시 낭송회’ 회장이 여분의 수영복을 지참하였다고 내게 내밀었다. 같이 가자는 권유와 인정에 감동하며 호텔에서 노천 온천까지 꼬마기차를 타고 갔다. 

  수영복을 입고 큰 수건으로 몸을 둥둥 말아서 가렸다. 이런 우스꽝스런 행색으로 고층 아파트 사이로 난 꼬마기차 길을 달렸다. 누가 봐도 폭소를 터트릴 것 같다. 서로를 바라보고 수줍은 듯이 낄낄거렸다. 

  길 옆에 피어있는 코스모스가 장관을 이뤘다.

  오룡배의 9월 하늘은 눈부시게 따가운 햇살을 우리들 등에 내려앉혔다. 마차를 타고 길진섭을 만나러 가던 정지용은 지금 이 따가운 햇살이 번들거리는 하늘 아래에서 찾을 수 없었다. 마차도 없었다. 

  노천 온천에는 중국어를 사용하는 20대 연인, 영어를 쓰는 60대 노년 부부, 장난기 어린 표정의 중년 남성들이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언어는 달라도 그들은 우리가 온천에 들어가지 못하고 쭈뼛거리자 조금씩 자리를 내주었다. 

  선글라스에 양머리를 한 우리 일행 중 한 사람이 맥주를 받쳐 들고 왔다. 노천 온천에서 땀은 속절없이 흘렀다. 유리잔 표면에 성애처럼 하얀 김이 매달린 맥주 맛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정지용이 길진섭이랑 빅토리아에서 호기롭게 “워드카 입빼이”라고 백계 러시아 여자에게 외치던 소리가 이 노천온천까지 들려오는 듯하다. 정지용의 여정을 따라 무작정 이곳저곳을 찾아드는 나는 아마도 그의 작품에 심취하였거나 미쳤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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