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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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길
  • 박미련 작가
  • 승인 2023.11.23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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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가려면 고개 하나를 넘어야 하는데, 길이 아닌 곳에 순전히 우리의 힘으로 길을 낸 적이 있다. 산허리를 따라 이미 길은 나 있었다. 

그러나 그 길을 따라가려면 늘 마음이 급했다. 학교는 지척인데 돌아가려니 어쩐지 손해 보는 것 같았다. 성질급한 친구들이 선발대가 되어 가시덤불 속을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학교가 멀었던 우리는 너도나도 새 길에 힘을 보탰다. 가시밭길을 오르내리느라 상처가 떠날 날이 없었지만, 시간을 줄여주는 그곳에 마음이 갔다.

세상 때가 묻지 않은 굽은 돌멩이도, 거친 땅의 기운을 박차고 올라온 무성한 잡초도 은근슬쩍 허리를 굽혀주었다. 선배가 끌고 후배가 다지면서 어느새 반들거리는 지름길이 되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하여 만든 길인데 오십이 넘어서야 겨우 찾아가 보았다. 그러나 낯선 포장도로가 목을 곧추세우고 있을 뿐 옛길은 사라지고 없다. 

어림하여 이곳이겠다 싶어 발길을 옮겨 보았다. 가시덤불 속으로 초입의 풍경이 돌올하니 되살아난다. 놀랍게도 밤낮없이 몰려다니던 친구들이 그곳에 있다. 반갑다고 속살거리기도 하고 왜 이제 왔냐고 샐쭉 돌아앉기도 한다. 

그러나 성급한 내 마음과는 달리 더 이상 길을 내어주지 않는다. 옛길은 마음의 문을 닫아건 지 오래인것같다.

명희, 정화 그리고 또, 그리운 친구의 이름을 떠올려본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친구들은 하나둘 대도시로 흩어졌다. 절친 정화와는 오랜 시간 함께하였는데 내가 서울로 올라오면서 그녀에게 가는 길도 흐릿해졌다. 한번 길이면 영원할 줄 알았는데 가뭇없이 사라지는 길을 보면서 원인 모를 상실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잊히는 길 사이로 새로운 길이 우후죽순 생겨나는 것도 어느 날부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옛길의 부침처럼 요 며칠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향하는 길을 보며 아득했다. 미국으로 이민 간 친구가 다니러 온다는 소식이다. 대학 시절, 시대의 아픔을 나눠진 둘도 없는 친구이다. 그때는 분노가 가을 서리처럼 내려앉아 우울한 날의 연속이었다. 

결국 중력에 떨어지고 마는 사과처럼 내 인생도 주저앉고 말 것 같은 불안감에 시달리곤 하였는데 친구는 특유의 유쾌함으로 희망을 주었다. 친구와 함께라면 고난의 행군도 재미 삼아 내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친구가 온다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었다. 여러 계획을 세워두고 친구를 기다렸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다. 여러 날이 지나서야 어이없게 SNS로 자신의 근황을 알려왔다. 도착했고, 친구들 만나 잘 놀고 있다고. “….” 더 보고 싶은 친구가 내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난 바람 빠진 풍선처럼 풀썩 풀이 죽었다.

그녀와의 길에 장애물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한쪽이 원하면 같은 맘으로 달려올 줄 알았는데 어느새 가시 덤불로 무성하지 않은가. 양쪽을 호위하던 쭉쭉 뻗은 소나무는 온데간데없고 싸리나무 망개나무가 길을 덮었다. 가꾸지 않아도 여전할 줄 알았지만, 나만의 착각이었다. 세월을 가볍게 여긴 오만이 된서리를 맞아 눈 감고도 달려가던 길이 가뭇없이 사라져버렸다. 세월을 탓하기도 하고 스스로 갓길에 나앉은 참을성 없는 길 자체를 원망하기도 했다.
물리적 거리만큼 마음의 거리도 소원해지는가. 오랜 시간 멀리서 각자의 생을 살다 보니 그녀와도 언제부턴가 마음에 가두는 말이 많아지긴 했다. 속없이 주고받던 말이 그녀에게 닿지 못하고 허공에 둥둥 떠다녔다. 할 말과 해서는 안 될 말을 고르는 성가신 과정을 거쳐야 하는 적신호도 감지되었다. 다만 인정하기 싫어 정리하기를 차일피일 미루어 온 것이 사실이다. 곧 제자리를 찾을 거라는 최면을 무시로 걸었던 것같다. 서로의 마음이 어긋난 것을 확인하는 순간 처음 얼마간은 무조건 손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다. 옛길의 정다움을 떠올리면서 안달하다가 원망하다가 불쑥 화를 내다가 삐치기도 한다. 친구도 같은 마음이었을 텐데, 자신을 추스르느라 친구의 마음을 헤아릴 여유는 더더욱 없었다.

애면글면하고 있는데 문득 세월에 맡기는 것이 정답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세월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감정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니 원망하던 마음도 가라앉고 편안해졌다. 그녀도 세월 따라 새로운 길로 접어들었을 뿐임을 안다.

마음만큼이나 복잡한 길을 이고 지고 사는 것이 세상살이 아닐까. 나 또한 무수히 많은 길을 내면서 살았다. 시원스레 뻗은 8차선 도로도 있고 시냇물 따라 끝없이 이어지는 오솔길도 있고 푸근한 골목길도 드나들었다. 길은 길마다 소중하여 어느 하나 허투루 버려둘 수 없다. 욕심이 많아서인지 사라지는 길이 아쉬워 온 길을 되짚어 걸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상처받은 상대의 마음을 어루만져 끝내 다시 길을 잇기도 많이 했다. 이제는 시합하듯 씽씽 내달리는 고속도로보다 정다운 이야기가 숨어 있는 골목길에 마음이 간다. 

그곳에서 하냥 어릴 적 장난꾸러기를 기다리고 싶어지는 나이인가 보다. 유독 많은 길을 만들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길을 여는 데 주저함이 없다. 한계가 없는 지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부르면 달려와 줄 것 같은 믿음이 있다. 무슨 얘기든 수용할 것 같은 편안함이 있다. 마치 잘 짜인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지휘자처럼 한 곳도 소홀히 다루는 법이 없다. 가끔 그런 이가 부러워 닮아볼까 애도 쓰지만, 얼마 못 가 익숙한 나의 길로 되돌아오고 만다. 앞으로 얼마만큼의 길을 더 낼 수 있을까. 새로운 길에 들뜨기보다 있는 길을 잘 가꿀 일이다. 나 또한 세상으로 향하는 지름길이기보다 고단한 영혼이 쉬어가는 에움길이었으면 좋겠다. 졸고 있는 가로등도 품어 안는 따뜻한 고샅길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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