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내일에게
상태바
오늘이 내일에게
  • 박미련 작가
  • 승인 2023.11.30 13: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늘에 내일은 언제나 그리움의 대상이다. 지척에 두고도 만날 수 없는 미지의 세계다. 상사화의 애틋함이 그러할까. 한몸에서 나 그저 흔적으로만 만나야 하는 상사화의 꽃과 잎처럼 오늘은 내일을 그리며 산다. 덕분에 우리는 삼백육십오 일을 새날처럼 맞이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아침에 눈을 뜨면 새로이 설렌다.

오늘은 무엇으로 채울까. 내게 온 오늘을 폼 나게 그려볼 참이다. 나를 둘러싼 소중한 것들을 떠올려본다. 일터에서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랑하는 가족의 손과 발, 총총한 눈빛. 다행히 나쁘지 않게 하루에 안착하는 모습이다. 환한 빛줄기가 그들에게 머문다. 욕심이 난다. 목소리가 그리워 수화기를 든다. 신호음이 울리는데 딸은 응답이 없다. 엄마 전화도 받을 수 없을 만큼 난처한 상황에 놓인 건 아닌지 마음이 쓰인다. 

아들은 수업 중이려나,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리자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엄마, 이따 전화 드릴게요.” 머리와 꼬리는 다 자르고 한마디로 끝이다. 엄마의 안부도 물을 틈이 없는 걸 보니 역시 바쁜 모양이다.

내게서 났건만 나만 홀로 두고 그들끼리 훌훌 날아가버린 기분이다. 빈 둥지가 되어 하냥 품었던 지난날만 그린다. 온전히 나 하나로 충만할 수 없을까. 애들은 훨훨 떠나 자유롭게 노니는데 여전히 그들의 안부에 나의 하루는 요동친다. 

커피를 내린다. 모시처럼 여린 햇살이 거실에 내려앉는다. 살을 비비는 먼지조차 하도 투명하여 보이는 대로 모아 안고싶다. 커피 향이 햇살을 만나 그네를 탄다. 거나하게 취한 햇살을 뒤로하고 커피 향은 내 안으로 들어와 흐른다. 잠깐의 저기압은 벌써 아득한 옛일 같다. 소파에 드러누워 책을 읽으면서 해가 이울도록 스스로 정물화가 된다. 온전한 평화다. 

지난해는 바빠 자신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시어머니가 아파 모든 시간을 어머니께 맞춰야 했다. 바람 따라 떠나고 싶다고 하시더니 어느 날부터 가시고기처럼 살을 내렸다. 힘겹게 쌓아온 어머니의 성이 무너져 내렸다. 나도 언젠가는 어머니 가신 길을 가야 할 텐데, 생각만 해도 허탈하다.

어머니와 긴 이별을 하고 계획 하나를 세웠다. 지친 몸을 달래고 고단한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궁핍한 내면으로 깊숙이 들어가 보기로 했다. 이제야 가문 논처럼 볼품없는 영혼과 마주한다. 햇살을 받을 틈 없이 꽁꽁 싸매 둔 마음밭이다. 잡념이 끼어들 틈을 주면 당장 현실을 해결할 힘이 빠져버릴까 봐 최대한 단순하게 살아온 결과다.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 가리지 않고 영화도 보고 책도 읽는다. 건조한 가슴에 물길이 생기기 시작한다. 다시 열어본 감성 저장고가 되었지만, 작동에는 이상이 없다. 좌판만 펼쳤을 뿐인데, 감각이 살아 꿈틀거린다. 단조롭던 일상이 활기를 띤다. 촉촉한 아침 공기와 함께 상쾌한 하루가 시작된다. 

내처 감성에 젖어볼 참이다. <파리 가는 길> 영화를 골랐다. 커튼을 내리고 스크린에 집중한다. 다이안 레인은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우아하다. 우연히 낯선 도시에서 파리까지 동행하게 된 로맨틱한 한 남자, 내 자신보다 내게 필요한 것을 더 빨리 알아채는 그 파리 남자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까. 낭만이라고는 밥 말아 먹은 지 오래인 그녀의 남편과는 비교되지 않는다. 그의 말은 꿀처럼 달고 행동은 날렵하기 이를 데 없어서 수시로 여자는 감동한다. 보는 나도 내 남자인 양 행복하다.

그러나 작가가 현실을 부정하고 그들의 사랑을 완성시키면 어쩌나 내심 걱정되었다. 다행히 파리에 도착한 그들은 위험한 선을 넘지 않았다. 약간의 여운을 뒤로하고 둘은 더욱 충만하여 일상으로 돌아간다. 난 내 식대로 그녀가 다시 만나게 될 남편을 새롭게 사랑하는 걸로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스크린에서 빠져나왔다.

조금 전만 해도 햇살은 묵은 손님처럼 허리띠를 풀고 앉았더니 싸한 기운에 황급히 꽁무니를 뺀다. 천변은 의외로 한산하다. 갈대는 여전히 누렁 잎을 매단 채 고개를 늘어뜨리고 그 틈을 비집고 올라온 호기심 많은 민들레가 간간이 눈인사한다. 저 건너 빌딩은 하나둘 불을 밝히고 발묵하는 불빛을 받아안은 강은 원시의 공간인 양 고요하다. 갈대가 둘러친 강어귀에 기러기 한 쌍 자맥질이다. 한 놈이 물속으로 사라지면 다른 놈도 뒤따라 쏙 머리를 감추고, 한 놈이 포르르 날아오르면 잇달아 다른 놈도 폴짝 얼굴을 내민다. 정답게 노는 기러기가 강의 풍경을 완성한다.

얼마 안 있으면 시원한 바람이 넘실댈 테고 많은 이가 이곳을 찾겠지. 색색의 봄꽃이 기지개를 켜고 연약한 연두가 세상을 호령할 테다. 잠자던 세상이 깨어나 소란하게 말을 건다. 단단한 오늘이 그를 닮은 내일을 데려오리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