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헌 선생 차남, 조완도(趙完堵) 강음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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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 선생 차남, 조완도(趙完堵) 강음현감
  • 전순표 옥천향토전시관장
  • 승인 2023.12.14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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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생 문인, 이괄의 난 토벌 공세워

조완도(趙完堵) 강음 현감은 중봉 조헌 선생의 차남으로 형인 장남 조완기 효자가 금산 전투에서 의병장 조헌 선생과 함께 순국하자, 중봉 조헌 선생의 가계를 이었다. 조완도 선생은 논산에 사시는 그 당시 성리학에서 예학의 대가이신 사계 김장생의 문인이다. 그는 1624년 ‘이괄의 난’ 때에 반란군을 토벌하고 공주까지 인조 왕을 호종하여 공신 녹권에 올랐고 당시 벼슬은 금부도사였고 후에 황해도 강음현감에 이르렀다.

장계 올리러, 되돌아 칠백의총 만듬

조완도 선생은 8월 18일 금산싸움 당시 조헌 선생 제자인 전승업, 곽현 선생과 함께 의주 행제소에 청주성 탈환과 관련된 장계를 서해안에서 뱃길로 의주에 올리려고 충남 홍성까지 갔었다. 그러나 금산싸움에서 조헌 선생이 순절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 전승업 선생과 함께 금산으로 되돌아와서 칠백의사의 시신을 수습하여 칠백의총을 만들었다. 

고경명 아들 고종후 별군 호응
 
임진왜란 개전초기인 1592년 7월 금산 눈벌 싸움에서 고경명 의병장이 전사하며 패하였고 조헌 의병 부대도 영규대사 승군과 함께 금산 연곤평 전투에서 조헌 선생이 전사하며 8월 18일 패했다.

이후 1592년 가을에 고경명 의병장의 아들 고종후 현령은 종군하며 아버지 고경명 의병장의 남은 병사를 거두어 별군을 만들자, 이 때에 이르러 체찰사 정철이 조정의 뜻을 선포하며 권유하자, 홍계남이 맨 먼저 여러 도에 편지를 보내니, 조헌의 아들 조완도(趙完堵) 등이 고종후 현령의 별군에 호응하였다.

조헌 묘소 이장, 안남 도농리로

원래 조헌 선생의 묘소는 옥천군 안내면 도이리 후율당 부근에 있었으나, 당시 조정에서 묘소 아래 사당을 세우고 이어 ‘표충(表忠)’이라고 사액하였습니다. 1636년(병자년, 인조14년)에 조헌의 아들 현감 조완도(趙完堵)가 조헌 선생 묘소를 충청북도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 축티(싸리재) 아래로 이장하였다. 그 당시 형편이 어려워 (이원) 표충사(表忠祠)는 새 묘역으로 즉시 함께 옮기지 못하였습니다”.

그 후 오가는 사람들이 가슴 아파하였고 문정공 송시열과 문정공 송준길 선생이 옥천군 안남 면 도농리 싸리재 새 묘소를 참배하고 “조정에서 무덤 아래에 사당을 세우고 특별히 사액하는 은혜를 베푸는 것은 실로 뜻이 있는 것이다.“라고 개탄하며 탄식하였다고 전해진다. 

조완기 효자 위패도 표충사에
 
1734년(영조 10년) 8월 10일자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조헌을 배향하는 표충사에 그 아들 조완기도 함께 배향하도록 할 것을 청하는 옥천의 유학 홍계연 등의 상소」가 수록되어 있다.

홍계언 등 옥천 유림은 ”아, 조완기는 일개 포의(布衣=선비)로서 환난을 맞아 몸을 던졌으니, 충과 효 두 가지가 다 온전하였고 의리와 절의가 환히 밝아서 선정에게 더욱 빛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본래 선조(先朝)에서도 정려하고 추증하였으니, 존숭하여 보답하는 의전이 지극하였습니다.“~<중략>~ ”삼가 바라건대 밝은 성상께서는 ~<중략>~ 특별히 유사에게 명하시어 사액하신 현판을 다시 거는 날에 배향하도록 허락하소서.”라고 상소하여 왕의 허락을 받았다. 옥천의 유학 홍계언 등이 영조께 올린 상소가 받아들여 만고 효자 조완기(趙完基)의 위패를 표충사에 함께 모셔 제향을 올리게 되었다. 

중봉 조헌 선생 표충사 연혁

한편 조헌 선생 충신 사당인 표충사는 선생 순절 후 1608년(선조 41년)에 옥천군 이원면 원동리 금강 기슭에 세웠다. 다음 해 조정에서 편액을 받은 사당이지만, 금강 변에 세워져 여러 번 수해를 입게 되자, 1650년(효종 1년) 우암 송시열 선생께서 옥천군 이원면 현리 마을 현재 창주서원 자리로 옮겨 세웠다. 창주(滄州)는 중국 절강성 무이산 주자(朱子) 주희 선생이 말년을 보내며 그곳의 아홉 군데 경치를 노래한 ‘무의도가(武夷九曲)’의 배경지이다.
숙종 8년인 1682년에는 중봉 조헌 선생과 신독재 김집 선생의 위패를 함께 모시며 창주서원이란 편액을 받아 표충사의 이름을 고치기도 하였다. 그 후 경종 1년인 1721년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 조헌 선생 묘소 아래에 사당을 다시 세우고 왕께서 내린 충신 사당으로 표충사(表忠祠)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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