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의 가문, 옥천 하동정씨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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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 가문, 옥천 하동정씨 인물
  • 전순표 옥천향토전시관장
  • 승인 2023.12.21 11: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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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의병, 정주현감, 정립, 정홍량, 정홍적, 정홍계

정주 현감 (이충범 의병)

정주 선생은 정립 선생의 형으로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 10월 이충범 의병장이 옥천군 동이면 쌍봉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켰을 때 참모로 참전했다. 이후 황간현감에 제수되어 황간현 백성과 유민들에게 볍씨와 농우를 공급하는 등 목민관의 도리를 다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27년(1594년) 12월 12일자에 비변사가 아뢰기를 "황간(黃澗)의 추풍령은 바로 적로의 요해지입니다. ~<중략>~ 명년 봄에는 마땅히 유민(流民)들을 불러모아 여기에 둔전을 설치하여 관방의 계획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황간 현감 정주(鄭霔)는 본집이 옥천에 있으므로 농사짓는 일을 꽤 알 뿐더러, 볍씨 수십여 석에 대해서는 자기 집에 소장된 것을 가지고와서 사용하기를 원합니다. 다시 해당 도의 감사로 하여금 편의에 따라 곡식 종자와 농우를 공급하여 적극 협력해 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고암 정립 (조헌·이충범 의병)

고암 정립은 조선 중기문신으로 옥천군 동이면 적하리에서 1554년(명종 9년)에 태어나서 87세까지 살았다. 그는 강한 숭현의식과 청렴한 목민관이자, 성리학자이로 62세 노인으로 대과에 합격한 대단한 노력가이다. 
그의 자는 군흡, 호는 고암(顧庵)이며 본관은 하동이다. 
부친은 상운찰방을 지낸 동강 정유건이고 어머니는 옥천 전씨이며 5남 3녀 중 5남이다. 그는 6세에 이미 문장을 지었고 26세에 진사가 되었다. 29세에 이름을 정방에서 정립으로 바꾸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 의병의 군량과 화살을을 모으는 직책을 수행했다. 그해 10월 이충범 의병장과 옥천 쌍봉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켜 장서기를 담당했다. 성리학자인 정립 선생은 문장과 학문이 깊어 태극설, 음양설 등을 강론했다.
그는 꺽이지 않는 의지로 62세인 1615년(광해군 7년)에 마침내 문과에 급제, 관직에 나가 처음 성균관학유, 전적, 병조좌랑을 지냈고 1617년에 진해현감이 되어 임진왜란 후 목민관으로 농업을 권장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이후 병조정랑, 경상도사, 춘추관기주관을 지냈으며 정묘호란 때는 김장생 선생의 휘하에서 의병모집 도유사가 되었고 3월에 동궁을 전주에서 공주까지 호종하였다. 이후 성균관전적, 교서관교리, 공조정랑, 성균관사예, 79세에 정3품 통정대부 군자감정, 판사에 올랐다. 벼슬을 마치고 낙향, 후학 양성과 백성들의 민원처리와 조세감면 상소를 올려 탕감 받도록 노력하고 숭현들의 업적을 선양하는데 노력하다가 옥천군 동이면 적하리 기사천 집에서 87세에 생을 마쳤다.

월봉 정홍량 (이충범 의병)

정홍량(鄭弘量)은 자는 여용(汝容)이고 호는 월봉(月峯)이다. 1616년(광해 8년) 아버지 정진(鄭震)의 장남이다. 그는 옥천군 동이면 적하리 기사천(耆士川)에서 태어났다. 상운찰방 정유건(鄭有謇)의 손자이다. 관직은 군자감 봉사을 지냈다.
옥천향토전시관에 소장되어 온 ‘하동정씨 분재기’와 ‘교지’ 등 18점은 2023년 4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411호로 지정되었다. ‘하동정씨 분재기’는 1628년(인조 6년) 정홍량의 처 청주 한씨가 본처 소생 3남 5녀와 첩 소생 정윤백에게 재산을 분배한 문서이다. 앞부분은 분급 배경과 봉사조, 장남 정증, 차남 정훈, 1~3녀의 사위. 4년, 3남 정용, 서자 정윤백의 순서로 작성하였다. 끝에는 도망 노비를 열거했다. 재주(財主)는 한씨이고 증인은 한홍윤, 정홍계이고 필집(筆執)은 정립이다. 이 문서의 연결 부분은 정립의 착명(着名)과 정홍량의 처 한씨 인장을 날인하였다. 뒷부분에 필체는 달리하여 옥천군수가 착명한 사실이 있다. 제일 뒷부분에는 강희 연간 노비 매매기록이 있다.

충효당 정홍적 (조헌 의병, 종용사 배향)
 
충효당(忠孝堂) 정홍적(鄭弘績) 선생은 본관이 자는 희지(熙之)이며 정립 선생의 5촌 조카다. 그의 조부는 정유의(鄭惟誼)이며 흡곡 현령을 지낸 동강 정유건 선생과 형제다. 부친은 정수(鄭需)이다. 일찍이 중봉 조헌 선생의 제자가 되었고 그의 기상과 부모에 대한 정성이 지극하여 충효당(忠孝堂)이란 호를 지어 주셨다.
임진왜란 때 조헌 선생께서 의병을 일으키자, 약관 18세의 나이로 조헌 의병에 주저함도 없이 뛰어들었다. 그는 조헌 의병장의 좌장으로 금산싸움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큰 부상을 입고 구사일생으로 옥천 안남 집에 돌아와서 치료하며 지냈다. 
그러나 금산전투에서 입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34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쳤다. 금산싸움의 공적으로 금산 칠백의총 종용사에 위패가 모셔져서 매년 제향을 지내고 있는 성리학의 충의와 의리정신을 실천한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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