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을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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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을 읽다
  • 박미련 작가
  • 승인 2023.12.21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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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가르고 저벅저벅 그녀가 온다. 먼 곳의 그녀가 문밖 가까이서 서성이고 있다. 애써 귀를 막고 고개를 가로저어도 어느새 문 앞! 드러나는 실루엣이 살 떨리게 싫다. 얼른 일어나 세수를 한다. 차가운 물에 마틀마틀한 살결이 정돈되길 바랐건만 더 무끈해졌다. 거울 속 그녀는 오늘만큼 가까이 다가와 태연히 나를 맞는다. 나는 또 오도가지도 못하는 신세가 된다. 꼼짝없이 그녀의 포로다.

낯설기도 했지만 마흔 대 언저리에서는 ‘그래, 올 테면 와라.’ 꽃길을 놓아주기도 했다. 젊은 혈기로 별거 아닌 양 의연히 맞아주었다. 문제는 지인들의 혼란이었다. 준비되지 않은 그들은 그녀를 불편해했다. 몇 번의 고집 끝에 반백을 포기하기로 했다. 몇 번의 고집 끝에 반백을 포기하기로 했다. 염색으로, 짙은 화장으로 짙은 화장으로 포장하면서 다가온 그녀를 멀리했다. 한동안 감추고 밀어내다 보니 그녀의 모습을 잊고 살았다. 변장한 모습이 진짜 같았다. 포장한 내가 나답다 착각하고 살았다. 

한 친구는 의연했다. 반백을 넘어 백발에 가까운 머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몇 년의 인내로 모양새를 완전히 바꿨다. 그런데 사람들의 오해가 들끓어 가는 곳마다 신분증 대조를 요구했다. 할머니가 젊은이 행세를 하려 든다고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불편한 심기를 하루에도 몇 번씩 토로했다. 하여 오랜 인내로 얻은 단정한 백발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시 갈색 머리를 하고 나타난 그녀! 언덕 하나가 툭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백발이 승승장구하길 바랐다. 나도 가야 할 길이기에 선발대가 목적지에 무사히 안착하길 바랐다. 이정표가 사라진 지금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할 뿐이다. 

문제는 문제다. 한 달도 안 되어 차오르는 백발을 무슨 수로 막아선단 말인가. 염색의 부작용도 만만찮다. 눈도 개진개진하고 눈물도 때 없이 쏟아진다. 딸아이가 아이를 낳으면 그녀를 의연히 맞이할 수 있을까. 백발 할머니의 어감에는 초라함보다 기품 있는 우아함이 먼저 떠오르니 말이다.

그녀는 머리로 끝나지 않았다. 그때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늦은 밤 거울 속에서 오롯이 그녀와 마주했다. 문상객을 맞이하느라 피곤하기도 했다만 느닷없이 나타나 얼마나 당황 스러웠는지 운 좋게 잘 피해 다녔건만 기회는 이때다 싶었는지 노골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눈꺼풀을 덮어 세모눈을 만들고 이마엔 냇물이 흘러도 좋을 만큼 깊게 골을 패고 눈가장자리 사이사이로 맘대로 그려놓은 내 천 자에 흘러간 세월을 보란 듯이 진열하고 있었다. 더 이상 숨바꼭질은 부질없는 짓 같았다. 불청객이 분명한데 그렇다고 쫓아낼 방법이 없다. 도린곁만 기웃거리던 그녀가 누가 반긴다고 현관문을 열고 거실을 돌아 이제 안방까지 차지하려 드는가. 누가 낯선 이곳에서 나를 좀 빼내어주었으면.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친구가 애타게 그립다. 그녀의 그녀도 어금지금하게 다가와 포로 신세인 걸 알기에 전에 없던 동지애가 샘솟는다. 닮은꼴 딸보다 친구가 위로고 기댈 어깨다. 오늘도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처지는 눈꺼풀 때문에 시야가 좁아 든다 했더니 여러 비방이 나왔다. 의술의 도움없이 그녀를 멀리할 꿀팁을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둘도 없는 동지다. 외롭지 않은 동반자다.

그녀의 존재를 실감할 때가 갈수록 늘고 있다. 그녀는 멀쩡해 보이는 거죽 뒤에 숨어 나를 조종하려 든다. 팔이며 다리며 부분 부분이 조여올 때는 내 몸이 풀 죽은 삼베옷 같다. 쪼그라드는 근육이 세월에 굴복하는 순간이다. 뼈를 단단하게 지탱하던 근육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연한 바람에도 풀풀 날리는 기분이다. 

연결고리에도 이상 신호가 온다. 활발하게 움직이던 관절이 뻣뻣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구부릴 때마다 힘들다 쉬어가라 명령이다. 너털너털 삐걱거리는 걸 보니 그도 엄살이 아니라 제자리에서 이탈한 게 분명하다. 갈수록 헐거워 시동 걸기도 힘들고 걸린 시동을 유지하기도 버겁다. 자꾸만 급한 걸음을 붙잡아서 마음만 내달릴 때가 많아졌다.

그녀는 몸을 뒤틀어 혼미하게 하더니 이제는 정신까지 잠식하려 든다. 세상으로 난 창을 하나둘 거둬들인다. 이글거리는 도시의 불빛이 금단의 땅처럼 낯설다. 다가서면 데일까 걱정부터 앞선다. 혼돈과 열정의 시대는 꿈처럼 아득하고 조바심과 안정이라는 키워드만 나를 지키고 있다. 잔잔한 파고는 삶의 활력이었고 제법 큰 파고는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보증서같은 거였다. 낑낑대며 뛰어넘으면 해냈다는 짜릿함에 서둘러 다음 일정을 짜곤 하였는데, 젊음은 그런 거였다. 보내고 나니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재산이었다. 그녀는 소원하는 모든 것들을 집어삼켰다. 그녀가 야속하여 자꾸만 뒷걸음질이다. 

완충장치도 고장이 잦다. 탄력은 사라지고 돌덩이가 되었다. 손톱만큼이라도 신경 쓰이는 일이면 소화를 못 시키고 꺽꺽 되새김질한다. 사는 건 지뢰밭을 건너는 일. 심장을 가격하는 폭탄이 지뢰처럼 숨어 있어 발을 내디딜 때마다 조심스럽다. 소심하고 더딘 게 세월 탓인  것 같아 쓴소리를 시도 때도 없이 퍼붓는다.

그래도 숨 쉴 틈을 주는 게 고맙다. 간혹 볕 좋은 날엔 그녀도 해찰하는지 나를 버려둘 때가 있다. 그녀의 그림자가 사라지면 몸부터 활기를 찾는다. 비실대던 세포들이 살아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심방의 펌프질도 제법 거세다. 무엇보다 마실 같 의욕이 돌아와 어디든 떠나자 부추긴다. 세상은 환희에 차고 나는 길 위를 나선다. 부디 좀 더 긴 여행이 지속되길 소리 없이 외친다.

‘그래 오늘만큼만, 딸 이만큼만이라도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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