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균(金萬均) 옥천군수, 누각 짓고 이지당 일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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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균(金萬均) 옥천군수, 누각 짓고 이지당 일신하다
  • 전순표 옥천향토전시관장
  • 승인 2023.12.28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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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사인, 보덕, 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자는 정평(正平)이고 호는 사휴(思休), 취선(醉仙), 이호(梨湖)이며 본관은 광산 김씨(光山金氏)이다. 그는 1631년(인조 9년)에 충남 연산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조선 예학의 대가 사계 김장생(金長生) 선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판 김반(金槃)이며 아버지는 이조판서 김익희(金益熙)이고 어머니는 이덕수(李德洙)의 딸이다. 국문소설 『구운몽』과 『서포만필』을 지은 김만중(金萬重)이 동생이며 송시열(宋時烈) 선생의 문인이다.
조선 중후기에 172대 옥천군수로 역임했고 재임 기간은 1672년(현종 13년)부터 1675년(숙종 1년)까지 3년 동안 재임하였다. 김만균(金萬均) 군수는 옥천군수 재임 시절에 옥천군 군북면 ‘이지당(二止堂)에  한시(漢詩)를 남겨 현재 시판이 전해온다. 다음은 김만균 군수의 한시이다.
호서용망일 천번지이추 (虎逝龍亡日, 天飜地履秋)호랑이 떠나고 용이 죽던 날, 하늘 뒤집히고 땅이 전복 되던 때  /사문기변노 오도의동주 (斯文期變魯 吾道疑東周)사문은 노나라가 되기를 기약하고, 우리 도를 동주에 비하였네  /현수존유묵 명구기승유(賢垂存遺墨 名區記勝遊)어진 가르침 유묵에 있는데, 명구에서 좋은 유람을 기록하네  /장수금득소 의구백정주(莊修今得所 依舊白汀洲)수양의 장소 지금 얻으니, 의구한 밝은 물가이네.

김만균 옥천군수 관직생활

1654년(효종 5년)에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왕이 진히 참석하여 치룬 과거 시험인 춘당대시(春塘臺試)에서 대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에 기용되었다. 그러나 첫 관직으로는 과분하다 하여 겸설서(兼說書)가 되었다. 이어서 정언(正言), 수찬, 검토관을 거쳐 홍문관 부교리, 교리(校理) 등을 지냈다.
1662년(현종 3년)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어 중국 청나라에 파견하는 사행(使行)에 따르는 평안도 서북 연변 각 고을의 경비와 사역 부담의 과중함을 상소하고 그 시정을 건의하였다. 그리고 집의, 필선, 사인, 보덕 등을 거쳐, 1672년에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의 승지(承旨)를 지냈고 바로 지방관으로 나가 1672~1675년까지 옥천군수를 역임했다.

우암 선생이 김만균 군수께 보낸 한시

아래 한시는 송시열 선생께서 조헌 선생의 시에 차운하여 김만균 옥천군수에게 보내는 오언절구 한시이다. 제목은 “공경히 중봉 조헌 선생의 이지당에 차운하여 김사군 정평 만균에게 보내다.(敬次重峯先生二止堂韻 酬金使君正平萬均)”이다.
신구림청차(新構臨淸泚) 새로 지은 집 맑은 물가에 임하니 /산퇴문기추(山頹問幾秋) 스승 가신 지 묻노라 몇 해던가? /천구기미원 (天衢箕尾遠) 하늘 거리에 기성·미성이 멀고 /인세세성주 (人世歲星周) 인간 세상에는 세성이 돌아 왔구려 /사업주서리 (事業朱書裏) 사업은 주자의 글 속이 /연원덕수유  (淵源德水遊) 연원은 율곡에게 놀았노라 /욕진명작천 (欲陳明酌薦) 맑은 술잔 올리고자 /빈조채방주  (蘋藻採芳洲) 마름 물가에 캐었노라 
이 한시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이지당(二止堂)에서 1672년~1675년까지 옥천군수로 부임한 정평(正平) 김만균(金萬均) 군수에게 보내는 한시로 중봉 조헌 선생께서 이지당에서 지은 한시에 차운하여 지은 시이다. 주자 성리학(性理學)의 높은 학문을 가진 중봉 조헌(趙憲) 선생을 그리워하며 율곡 이이(李珥) 선생의 문인임을 나타내며 그에 대한 공경심을 표현했다. 끝 귀(句)는 다른 책에는 “평생 사모 간절하니 오늘도 물가에 섰노라(평생권앙지(平生勸仰止), 금일입정주(今日入汀洲)”으로 달리 기록되어 있다. 

김만균 군수 이지당 누각 짓고 일신함

1674년 무렵에 김만균(金萬均) 군수가 주도해서 ’이지당‘의 왼쪽 2층 누각를 창건하는 등 이지당의 면모를 일신하고 송시열 선생이 각신서당(覺信書堂)이란 명칭을 이지당(二止堂)으로 고쳤다. 중봉 조헌 선생과 우암 송시열, 김장생의 증손자인 김만균 군수는 옥천이라는 지연과 기호학파라는 학연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러한 관계는 조헌(趙憲) 선생 사후에 이지당이 정사(亭舍)로 활용되고 유지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옥천 이지당은 보물 제2107호이며 팔작지붕 형태의 한옥으로 본채와 누각으로 되어 있다. 본채는 앞면 7칸과 옆면 1칸의 강당 건물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의 기와집이다. 가운데 3칸은 대청이고 양쪽 2칸은 거실이다. 누각은 단 위에 누마루 1칸 규모의 팔작지붕에 난간을 둘렀다. 대청에는 조헌 선생 친필인 '각신서당(覺新書堂)'의 현판이 있고 옥천향토전시관에 진품과 「이지당기」, 「이지당강학조약」 등을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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