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 송정 전팽령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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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 송정 전팽령 선생
  • 전순표 시인 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 승인 2024.01.04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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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5백년 옥천출신 유일한 청백리, 밀양부사, 상주목사 역임

조선왕조 500년 동안 청백리는 모두 218명을 배출하였다. 옥천군에서 유일하게 청백리에 오르신 분은 조선 전기 밀양부사와 상주목사 등을 역임한 동이면 출신 송정 전팽령(全彭齡) 선생이다.

조선의 청백리는 관리들 중에 청렴결백한 자를 의정부, 육조 경조의 2품 이상 당상관과 사헌부, 사간원의 수직들이 추천하여 임금의 재가를 얻어 선정한 청렴한 벼슬아치들로 후세에 귀감으로 삼기 위해 마련되었던 제도이다. 선정된 청백리는 그의 가문 뿐 만 아니라 종중까지도 커다란 명예가 되었다.

송정 전팽령 청백리는 아버지 전응경 참판과 어머니와 안동김씨 사이에서 1480년(성종 11년) 11월에 3남 중 삼남으로 옥천군 동이면 적하리(기사천)에서 태어났다. 그의 자는 숙로(叔老)이고 호는 송정(松亭)이다. 본관은 옥천에서 대대로 산 토성인 옥천 전씨 11세손이며 1560년(명종 15년) 80세에 생을 마쳤다. 그가 두 살 때 아버지 전응경 참판이 일찍 돌아가셔 참의를 지낸 할아버지 전효순에 의해 형인 전팽조(全彭祖), 송오 전팽수(全彭壽)와 함께 양육되었다. 어릴 때부터 품성과 총명함이 빼어났고 8세부터 두 형을 따라 학업 정진하였고 18세에 과거 공부를 시작, 1504년(연산군 10년) 식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되었다. 또 관시와 별시에 연이어 1등 합격하여 사람들의 큰 관심을 받았고 그는 1503년(연산군 9년)에는 안성 이 씨와 혼인하였다. 1507년(중종 2년) 문과 관시에 1등을 하였다.

1508년 29세 때에는 부인 인성이씨 상을 당하고 이어 바로 그를 키워준 할아버지 전효순 참의께서 세상을 떠서 예법에 따라 상례를 치뤘고 다음해 상주 김씨를 부인으로 맞이했다. 

1511년(중종 6년)과 1513년(중종 8년) 32세, 34세에 장악원 별시에서 각각 장원급제를 하였다.

518년 39세에 현재 금산군인 전라도 진산군(珍山郡) 훈도가 되었다. 40세 되던 1519년(중종 14년) 효렴 현량과에 친시에 2등으로 올랐으나, 최종 과거시험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1524년(종종 19년) 45세 때 별시 문과에 급제했고 1527년 성균관 별시에서 장원 급제, 1529년 별시 문과 3등으로 급제하였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치지만 지병으로 취임치 못했다. 1531년 52세에 평안도 평사, 이어 성균관 전적 겸  중학교수, 형조, 공조, 형조좌랑을 지냈다. 

56세에 구성교수를 지낸 전팽조(全彭祖) 큰 형의 상을 치르고 낙향하여 여산부사를 지내던 작은 형 송오공 전팽수(全彭壽)와 함께 고향 옥천 적하리 기사천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지냈다. 

1536년(중종 31년) 56세에 사도시정을 거쳐 단천군수에 부임했다. 이곳 군수 시절 그는 진심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조처하여 폐단을 제거하고 군정을 청렴하고 근검하게 힘쓰니, 이에 백성들이 편안하였다 한다. 

63세에 내자시를 거쳐 삼척부사를 지냈고 1544년(중종 39년) 밀양부사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서 1545년(인종 원년)에 옥천 동이면 금암리 금강 기슭에 양신정(養神亭)을 세우고 시 짓기와 독서로 산수를 벗하며 쉬었다. 

1549년(명종 4년) 70세에 상주목사에 제수되었으나, 그해 큰 흉년이 들어 서로 사람을 잡아먹을 지경으로 백성들이 굶주렸다. 이에 성밑에서 죽을 끊여 백성들을 구휼하며 지극 정성을 다했다.

이에 1550년(명종 5년) 71세에 상주목사로 통정대부에 특별 승진하고 포상을 받았고 2회에 걸쳐 왕께 표리를 하사받았다. 

1551년(명종 6년) 상주목사를 사직하고 옥천에 낙향, 송오 전팽수 작은 형과 금강 기슭 취원정과 양신정에서 자연과 함께 했다.

1552년 73세에 사용(司勇)에 임명되었고 조정에서 11월에 청백리에 뽑히는 영예를 안겼다. 1553~54년, 74~75세에 정평, 선산, 강릉, 안동 부사를 제수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555년 76세~77세 벼슬을 내놓고 학문에 열중하였다. 

1559년(명종 14년) 가선대부에 가자되어 부호군을 받았고 예조참판, 강원관찰사을 제수하였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리고 1560년(명종 15년)에 81세의 일기로 생을 마쳐 고향 고라산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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