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은 생각보다 훨씬 큰 능력치를 발휘한다. 멀리서 다가오는 아들의 그림자를 쫓다 보면 어느새 난 아들 곁에 있다. 차를 주차하고 엘리베이터를 탄다. 함께 탄 이웃에게 가벼운 눈인사도 잊지 않는다. 현관문이 열리고 아들의 목소리가 내게 닿는다. “엄마.” 문 앞에 대기하고 있다가 품 넓게 끌어안는다. 기둥처럼 듬직한 아들이 한아름이다. 품이 좁아 안타까운 나는 더 크게 팔을 늘어뜨리며 몇 번이고 아들의 등을 쓰다듬는다.
준비해 놓은 반찬이 활기를 찾는다. 뚝배기가 내 마음처럼 졸랑졸랑 소리를 내고 식탁엔 갓 무쳐낸 나물이 정갈하게 깔린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고기도 그득하게 내놓는다. 모처럼 찾아온 아들과 마주하는 식탁이 싱싱하다. 아들과 함께 있으면 손이 많이 가던 남편도 자연스레 어른이 된다. 햇빛 따라 기울이는 해바라기처럼 그의 기울기도 아들을 향한다. 밀려나는 기분이라며 볼멘소리도 하지만 그가 먼저 자리를 내어주고 무심한 듯 멀찍이서 아들의 시선을 쫓는다. 아들의 다부진 근육이 섬세한 젓가락질에 움찔거릴 때마다 눈꼬리까지 올라간 그의 입매가 은은한 초승달을 닮았다. 식탁에 둘러앉은 우리는 하나같이 흐뭇한 마음으로 푸근한 저녁을 맞는다.
아들이 구우면 고기 맛이 일품이다. 육즙을 품은 등심이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린다. 부드럽기가 비단결이다. 고소함을 품은 고기가 끝을 보일 때까지 시선은 그도 나도 아들에게 붙박여있다. 화려한 손놀림이 마치 예술의 경지에 이른 거 같다. 아들의 현란한 손놀림 자체가 작품이기도 하지만 내 안에서는 또 다른 그림이 완성되고 있다. 아들이 대상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너울지는 꿈으로 온다. 다가가면 더욱 커지는 행복의 블랙홀이다. 기꺼이 빨려드는 형형색색의 혼돈. 가슴에는 묵직한 질감으로 조용히 들뜨고 있는 무지개가 뜬다. 대상이 나만의 작품이 되는 걸 보면서 행복은 느끼는 자의 몫임을 실감한다.
조건 없이 자식에게 기울어지는 현상은 수수께끼 같다. 같은 DNA를 가져서라고는 하지만 볼 수 없는 그것에 휘둘리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물질의 조합이 정신을 지배하고 운명을 결정짓는다. 기울이는 곳에 따라 전혀 새로운 삶이 전개되기도 하니까 본능적인 이끌림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신호라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진자리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어미의 본능이다. 내가 죽어 아이가 산다면 기꺼이 나를 죽이는 것이 어미다. ‘달팽이가 바다 건널 걱정을 한다’ 하지만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이 부모 자식 사이를 해석할 때는 아무런 거부감이 없다. 부모와 자식 간에 흐르는 초월적인 힘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인지의 눈은 가치의 눈으로 바뀌어 귀한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서 세상의 잣대를 무력화시킨다. 어미는 자식 앞에 서면 달팽이처럼 물불 안 가리는 용기가 샘솟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더불어 살 수 있는 것은 기울기가 부모와 자식에만 한정되지 않고 영역을 넓혀 수시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같은 뜻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어깨가 비에 젖어도 받쳐 쓴 우산이 상대에게 저절로 기운다. 기운다는 것은 그를 이해하고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는 의사 표시다.
부부는 사랑으로 시작하여 동지애로 서로를 애무하고 남은 전우애로 산화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님은 홀로 농사를 지으신다. 아직 힘으로 못할 일이 없지만, 꼭 둘이 필요할 때가 있단다. 비닐을 덮을 때는 맞은쪽에서 누가 슬쩍 비닐 끝만 잡아줘도 좋겠는데 사람이 없단다. 네 귀퉁이를 돌며 겨우 자리를 잡아두고 한쪽을 흙에 묻으면 다른 쪽이 당겨와 자리를 이탈하는 것이다. 두 배의 수고가 아니라 그 이상의 품을 매야 겨우 비닐을 덮을 수 있다고 푸념하신다. 그림자 같던 짝이 곁에 있다면 일도 아닌 일이라 신산하고 가슴이 서걱거린다. 퀭한 가슴에 주먹만 한 바람이 들락거려도 막아주는 짝이 없으니 늘 시린 채로 살아야 하는 게다. 자신만 바라보던 기울기가 사라진 걸 확인할 때마다 얼마나 헛헛할까.
기울기는 슬픈 일에 쉽게 반응하는 특성이 있다. 연민이 사랑보다 더 무서운 것이 그러한 이유이다. 이성적 사랑은 감정의 극한이지만 연민은 사랑에 이성이 더해져 어쩌면 더 견고하다 하겠다. 더러운 게 정이라 읊조리는 것도 연민의 질긴 내성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잘못 들여놓은 길임을 알아채더라도 연민이 붙들면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 기울기는 본능적으로 연민에 작동하여 이성적 판단과 무관하게 몸이 벌써 다가가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아직도 희망이 있다. 작은 것, 소외된 것들에 반응하는 연민의 인자가 세상 이곳저곳에서 감지되기 때문이다.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선뜻 우산을 건네는 사람은 연민에 취약한 사람들이다. 굳이 마더 테레사 같은 성인이 아니라도 간간이 그들의 아름다운 삶이 매스컴을 탄다. 양심을 위해 최소한의 선행에 동참하기도 어려운데, 그들의 안부는 늘 주눅 들게 한다. 서 있는 위치를 돌아보게 하고 자책의 회초리가 마음을 다잡게 한다.
마음밭을 넓혀 나가야겠다. 아들만 챙기던 여린 팔이나마 다급한 이에게 내어줘야겠다. 후미진 바람골에서 거센 바람을 맨몸으로 맞고 있을 누군가에게 시간과 마음을 기울일 일이다. 그를 위한 선행이 아니라 내가 건강하게 사는 길이다. 기울기에 따라 햇빛도 유감한지 빛을 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