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길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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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길목에서
  • 배정옥 수필가
  • 승인 2024.01.18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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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지게에 이어서>
 
가뭇한 기억 속에 일생을 같이했던 지게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었을 터, 긴긴세월 뾰족했던 아버지의 삶의 무게가 세월의 무게였음을 생각하니 마음이 눅눅해진다. 흥건히 땀에 젖어 벗어놓은 지게에선 풋풋한 풀냄새와 찝찔한 맛과 비릿한 냄새가 났고 소금기마저 서걱거리던 기억들을 떠올릴 때면 가슴이 시려온다. 

 어느 겨울날이었다. 갑자기 어두침침한 하늘에서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일 년 내내 모아두었던 눈을 쏟아내려는지 ‘윙윙’ 소리를 내며 폭설이 쏟아졌다. 아버지의 하얀 머리카락보다 더 하얀 함박눈이 온 세상을 덮었다. 아버지가 나무하러 가셔서 돌아오지 않았던 터라 마중을 나갔다. 한참 지나서야 동네 어귀에 허적허적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돌아오시는 아버지 지게의 나뭇단 위에는 하얀 눈이 소복했었다. 반가움에 “아버지.” 불렀더니 “어이 추운데 집에 있지 않고, 어여 가.” ‘휴’ 순간 안도의 한숨과 가슴에선 뜨거움이 울컥하였다. 하얀 눈보라 속에 꽁꽁 언 아버지의 주름진 얼굴은 검붉다 못해 시퍼렇게 멍들어있었다. 윗옷을 벗어 건네시던 아버지의 손은 나무토막처럼 거칠고 딱딱했었다. 그날의 아버지 옷자락에 묻었던 한기를 잊을 수가 없다. 

 여름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는 마당가. 하늘을 보니 청명한 하늘에 흰 뭉게구름이 산과 맞닿아 있다. 대문 앞을 나서기만 하면 녹음에 묻힌 산사처럼 사람도 성장한 초록 세상에 안겨 있음을 본다. 꽃밭에는 백일홍, 원추리, 봉숭아, 채송화 등 꽃들이 촉수를 세우고 한창이다. 그 한편에 아버지의 지게에는 봄에 심었던 꽃이 한 짐 피어있다. 그렇게 여름은 깊어가고 땀방울로 터전을 내셨던 꽃이 한 짐 피어있다. 그렇게 여름은 깊어가고 땀방울로 터전을 내셨던 아버지의 지게에는 겹시름 대신 꿈을 잉태한 꽃이 한 짐 가득하고 추억의 한 자락을 지고 있다.

 어느새 나의 머리에도 하얀 눈이 내렸다. 이제야 알 것 같다. 우리의 남은 삶은 무엇으로 채울까 생각해보니 사람은 자연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울타리 안에서 사는 것임을 아주 먼 길을 돌고 돌아 이제야 깨달았다. 지금도 아버지는 당신의 땅에서 계시는 듯하고 아버지의 자식들은 그 자리에서 그때 그 모습으로 살고 있는 듯하다. 

 꽃은 소리 없이 피었다 지고 연둣빛이 붉은빛의 어제가 되고 붉은빛이 오늘의 연둣빛이 되는 계절의 반복을 보며 아버지가 저세상으로 가신 지금도 ‘땅은 거짓말을 안 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이 해가 갈수록 퍼내도 마르지 않는 펌프 물처럼 울컥거린다. 세월의 뒷자리에 밀려난 낡아진 아버지의 지게를 보면 요즘 들어 유난히 흑백 사진첩 같이 갈피마다 그립다. 

세월의 길목에서

어느덧 겨울도 깊고 깊어 동지를 지나 세밑에 와 있다. 한 장 남은 달력이 힘없이 펄럭인다. 몇 자 남지 않은 숫자들, 일 년 내내 받아 적은 사연들이 미처 다스리지 못한 파문의 내력들이 또렷하게 찍혀 있다. 지나간 시간의 흔적들이 날밤을 새우며 고개를 든다. 해묵은 세월의 길목에서 수북했던 시간들이 바람에 빠져나가듯 술렁술렁 꼬리를 보이고 있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의 지평선이 목멤으로 다가온다. 그러고 보니 지천명을 지나 이순을 지나 벌써 환갑의 나이가 되었다. 예전 같으면 완전 상늙은이에 속한다. 백수 인생에 요즘은 늙은이 측에도 못 끼긴 하지만, 마음만 젊지 몸은 따라 주지 않는 것 같다.

 논어에 보면 이순, 육순은 인생에 경륜이 쌓이고 사려와 판단이 성숙하여 남의 말을 받아들일 줄 아는 나이라 한다. 

 인생의 묘미를 조금씩 알기 시작하자마자 살아온 날들보다 돌아갈 시각이 턱밑까지 차올라와 있었다. 젊었을 때는 미래를 위해 꿈의 꽁무니만 열심히 따라다녔다. 어른들의 말이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구 이놈들아, 너희들도 살아봐.”

 “이마에 닿았어. 너희들은 안 늙을 줄 알아?”했던 말들이 쓸쓸히 허공을 맴돌고 나의 입가에서도 힘없이 되뇌고 있다. 

 돌이켜보면 젊었을 땐 창창한 세월이 멀게만 느껴졌었다. 미래가 지나온 길목에서도 끝이 어딘지 모를 길들이 쭉 펼쳐있는 줄만 알았었다. 그런데 코앞이라니, ‘뭐든 때가 있다.’던 어른들의 말들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그때는 무엇이든 맘만 먹으면 언제든 다 해낼 수 있는 자만심이라 할까? 자만심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헛웃음만이 내 입가에 어른거린다. 이제는 알 것 같다. 세상에는 자기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걸 점점 늘어나는 주름살을 보면서 알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어찌하랴, 그런 변화는 자연의 이치인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금보다 우울한 날들이 더 많아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유년시절 톱 가수였던 조용필의 히트곡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라디오든 TV든 틀기만 하면 흘러나오던 때가 있었다. 그 시절 나의 꿈은 막연히 작가가 되고 싶었다. 작가가 가사가 뭔지도 모르던 코흘리개 어린아이는 노래를 만들어 훌륭한 가수들에게 주고 싶었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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