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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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133)
  • 송지호 성신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24.01.25 14: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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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다른쪽에서는 대통령의 실세 비서관이 이 건을 꽉 물고 있어 어려울 것 같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 이유를 물으면 다들 특별한 이유는 없는 것 같다면서 회의에서 어떤 사람이 ‘왜 방송국도 하고 학장까지 하려 하느 냐’는 이야기가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 동아그룹이 운영하던 동아 TV가 있었다. 그런데 IMF 사태가 터지면서 동아그룹이 도산했고, 동아 TV도 문을 닫았는데, 문화관광부에서 허가를 받아 남편이 인수, 새로운 아이디어로 방송국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말한 것이었다. 그러면 애국자이지 망한 방송국을 살려 운영하는 것이 무슨 혜택이며, 투표로 선출된 학장 연임이 무슨 나쁜 짓을 했다는 것인지 분통이 터지는 것은 나였다. 하지만 나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교수들에게 공언한 것이니 내가 직접 청와대 문재인 비서실장에게 탄원서를 내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국립의료원간호대학을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다가 58년 대학 설립한 지 42년 만에 처음으로 간호학 교수로서, 직접선거로 학장에 선출되어 오로지 어려운 상황에 놓인 모교의 발전만을 위 해 헌신하고 살았다. 나는 작은 단과대학 간호대학장으로서 정치도 모르고 세속적인 말로 출세니 성공이니 하는 개념과도 거리가 먼 사람으로 살아왔다. 그저 여성만의 집단인 간호의 발전을 위해 국립대학인 NMC 간호대학이 어떤 기능과 역할을 할 것인가 외에 다른 생각을 할 시간도, 친구들과 한가로이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없이 나름 헌신해왔다고 믿는다. 

국가적 위기였던 IMF 사태 때도 국립대학으로서의 사명 을 다하기 위해 외국과의 교육사업을 개발하고, 간호사의 국내 취업률이 43%였던 고난의 시기를 극복할 수 있는 해외 취업의 길을 개척하는 국가적인 성과도 올리는 등 간호에만 매진해왔다. 그런데 자의였든 타의였든 간에 다시 4년 임기를 마치기 전에 학장선거에서 선출되었고, 학장임명 관련 서류는 교육부 장관 재가를 거쳐, 청와대에 가 있는 데 어떤 설명도 이유도 밝히지 않은 채 깜깜이로 학장임명은 나지 않은 채 다시 학장선거를 해서 2인 후보를 올리라는 교육부 지시를 받았다. 나는 학장을 안 해도 상관없으니 부디 4년이나 학장을 역임하고, 나름 성과도 작지 않았던 본인에게 어떤 하자가 있어서 발령을 못 낼 정도의 문제가 있었는지 그 이유만 밝혀준다면 일체의 이의제기 없이 청와대의 인사 결정을 받아들이겠다. 그 이유도 모른 채 발령을 거부당한다면 한 개인에게 평생 잊지 못할 상처로 남을 것이고 청와대의 명예를 위해서도 꼭 그 이유만은 본인에게 통지해주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탄원서를 제출한 후 2주일 정도가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나는 기다리다 못해 어쨌든 칼집에서 일단 어렵게 칼을 빼 들었으니 그냥 말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청와대 비서실장실에 탄원서가 접수된 것인지 전화를 해서 확인해보기로 했다. 전화하니 여자 비서가 받았다. 

나는 내 소개를 하고 물었다. “탄원서를 보냈는데 혹시, 받았느냐?” “받았다.” “그럼 실장님께 보고했느냐?” “보고도 하고 편지를 직접 갖다 드렸다.” “보고 받고 뭐라고 하셨냐?” “알았다 읽어보겠다고 하셨으니 곧 편지하시든지 연락을 하실 거다.”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어 다행스럽게 생각했지만, 확실하게 비서의 이름을 묻고 유ㅇㅇ도 기억해두었다. 전화를 끊고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곧 내가 가슴앓이하고 있는 발령거부 이유를 알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눈이 빠지게 기다려도 함흥차사였다. 나도 오기가 발동했다. 다시 청와대로 전화하여 비서와 통화했다.

“내가 지난번 전화한 사실을 실장님께 보고 드렸느냐, 뭐라고 하시더냐?” “바로 보고 드렸고 알았다고 하셨으니 곧 연락하실 거다.” 비서가 그날 바로 문재인 실장한테 보고했다니 고마웠고 또 실장님이 곧 연락하겠다고 답했다니 더 고마웠다. 도덕성과 정의로움을 내세운 진보 정부에 대한 작은 희망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믿고 조급해하지 말고 좀 더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그 후에 아무리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깜깜무소식이었다. 분노가 치밀어서 더는 알아보고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최소한 차관급인 국립대학 기관장의 부당한 인사문제에 관한 정당한 질의마저도 무시해버리는 그런 사람들로부터 해명을 들어서 뭐하랴 싶었다. 
그들만의 리그에서 나는 냉소와 환멸을 느꼈다. 그래서 차라리 내 자존심 속에 묻어두려고 했다. 그러나 나 는 내 인생 궤적에서 그 일을 지울 수가 없었다. 더구나 바로 그분이 대통령이 되어 매일 눈앞에 보이는 한 볼 때마다 그 일이 떠오를 밖에 없는 것이 심히 괴롭다.

학장 2년만 하고 송 학장한테 넘겨줄 테니 나를 밀어주세요 

한 교수의 학장 자리에 대한 도 넘는 탐욕이 부른 피해는 상상 이상이었다. 수개월에 걸쳐 마음이 떠버린 교수들은 불안한 나날을 보냈고, 그러한 사태의 원흉으로 지목된 A 교수는 교수들로부터 분리되어 침묵으로 일관했다. 나는 한 번도 A 교수와 이 사태에 대해 말다툼을 하거나 잘못을 따져본 적이 없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어버린 마당에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과 진위를 따져 물을 가치도 없었다. 하지만 정의파 정 교수는 학교가 어려워지는 것에 분을 참지 못하고 회의 때 A 교수에게 진실을 고백하라고 큰 소리로 말하곤 했다. 하지만 A 교수는 언제나 침묵으로 일관했다. 후배 교수한테 그런 말을 들으면서도 말 한마디 못하고 지냈고, 때로는 교수회의 참석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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