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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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134)
  • 송지호 성신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24.02.22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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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더니 “송 학장은 이제 할 만큼 했으니 교수 그만두고 동아TV 사장이나 하세요. 지금 여성 장관감이나 여성 지도자를 찾으려 해도 그리 여성 인재가 많지 않다고들 해요. 송 학장은 교수에 박사에 학장까지 했고 또한 대인관계도 좋고 좋은 인상도 가지고 있으니, 방송국 사장 경력까지 갖추면 그만큼 두루 훌륭한 경험과 스펙을 가진 여성 리더는 많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이제 그 골치 아픈 학교 일에만 매달리려 하지 말고 교수 생활은 여기서 접고 인생의 항로를 조금 바꿔보세요. 송 학장이 다른 일을 해도 잘할 사람으로 믿고 요즘 다음 대권 주자들이 좋은 여성 리더들을 찾고 있으니 나도 기회가 되면 도울 수가 있어요. 그러니 오늘 당장 집에 가서 남편하고 상의해서 일단 방송국 사장을 고려해보도록 하세요.” 권유라기보다는 좀 더 확신에 찬 말로 장관님은 나를 설득하셨다. 갑작스러운 장관님의 제안에 어리둥절해진 나는 즉답을 할 수 없었다. 지금 수렁에 빠진 NMC 간호대학을 그냥 두고 내가 교수직을 그만둔다는 것은 마치 가장인 내가 가정을 팽개치고 떠나는 것과 같은 마음이었다. 분명 내게는 새로이 개척해볼 수 있는 매력 있는 제2 인생의 길일수도 있다는 유혹도 있었다. 어쨌든 평소에도 나를 아껴주셨고 지금도 끊임없이 인정해주시는 애정에 고마움을 느끼며 예스는 못 하고 알겠 다고만 하고 헤어졌다.


그날 밤 남편에게 장관님의 말씀을 전하고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당신만 좋다면 사장 임기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사장해도 좋지. 당신이 방송국 사장을 하면 잘할 수 있을 거야. 나도 당신이 최근 비생산적인 일로 너무 체력을 소모하고 힘들게 지내는 것 같아서 학교를 그만 두는 것엔 찬성이요.”평소에도 내게 우리 방송국에도 당신같이 오직 직장만을 위해 몸을 던지는 사람 하나만 있으면 좋겠다며 농담 아닌 농담을 하던 남편의 당연한 반응이었다. 망설임 없이 내 말에 예스 하는 남편 말을 들으니 두려움 같은 걱정이 앞섰다. 그럼 나는 그렇게 간다 치고 학교는 어떻게 되지? 더욱 걱정이 조여왔다.
다음날 나는 정 교수를 만나 그간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으며 참으로 곤혹스러운 심정으로 말했다. 정 교수는 “학장님은 그런 쪽으로 가셔도 잘하실 거예요. 학장님 개인으로 봐서는 그 선택이 지금으로서는 더 좋은 선택일 것 같고요. 그러면 학교는 어떻게 해요?” 하는 말이 내 심정과 다르지 않아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그런데 다음날 정명실, 김애리, 조정민 교수가 내 방을 찾아와 내 앞에 나란히 섰다. 나는 세 교수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학장님 개인을 생각해서도 저희가 학장님을 보내드려야겠지만, 그 길로 가시려면 학교를 살려주시고 그다음에 그만두시면 안 될까요? 저희도 평생직장인데 학교가 없어지면 저희는 어떻게 해요?”교수들의 말에 나는 그만 코가 찡해지고 가슴이 뭉클했다. 평소 지 금까지 나와 함께 가족처럼 때로는 내 손발이 되어 희로애락을 같이 해왔던, 내 친동생만큼 아껴왔던, 그 교수들이 지금 그들의 생사여탈을 호소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나만 좋자고 한 이기적인 선택인 것 같은 미안함이 엄습했다. 그 순간 나는 끝까지 저들 교수와 고락을 함께해야 한다는 책무감이 스쳤다. 나는 그들에게 알았다고 답하고 나를 포기하 자고 결심했다.


그날 밤 남편에게 나는 방송국 사장 안 할 것이니 어제 말은 잊으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장관님께는 만날 약속을 하고 “장관님,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그냥 살겠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학교와 교수들을 버리고 제가 떠날 수는 없을 것 같아서요. 장관님께서 보여주신 저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했더니 장관님께서는 목청을 높여 말씀하셨다. “때로 사람은 자기를 위해 과감한 결정도 필요한 것인데, 송 학장은 그렇게 마음이 약해서 큰일 하겠어요? 다시 한 번 심각하 게 남편하고 상의하고 생각해보세요.” 하는 통에 “네.”하고 일어섰지만 내 마음은 이미 요지부동이었다. 며칠 후 나는 장관님께 전화로 죄송하다는 말씀을 거듭 드리고 그 일은 없었던 것으로 내 머리에서 지우기로 했다. 장관님 말씀대로 나는 너무 마음이 약한 것이 내게 병일까, 득일까 하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아직도 답이 없는 물음으로 남아있다.

10부
 
전무후무한
국립대와 사립대의 통폐합

성신여대로 가는 길은 
이렇게 험난했다

정형근 국회 예결위원장으로부터 2006년도 말까지 1년 예산을 되살려 받은 후부터 나는 진짜 스트레스가 시작됐다. 그즈음 어느 날 내 고민을 잘 알고 계시던 김화중 장관님이 전화하셨다. “송 학장, 성신여대 어때요? 성신도 간호대학을 원하고 있으니 한번 만나보지요.” 장관님의 말씀에 일단 인서울 대학이고 여자대학교라는 점에 만나 볼 가치를 느꼈다. 그때 내 머릿속의 기준은 일단 서울 소재 대학, 간호학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대학, 그리고 간호대학의 발전 가능성이었다. 그 후 성신학원 이사장과 독대를 해보니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 이사장으로 간호대학 설치에 대한 열망이 컸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당장 1년 후 우리 NMC 재학생 2, 3학년이 들어가 바로 수업과 기본간호학 실습을 진행할 건물과 교수 연구실 등의 넓은 공간을 소유하고 있는가 


였다. 간호대학 공간은 마련할 수 있다고 했다. 학교 재정상태도 괜찮아 적립금도 문제없다고 판단했다. 긴 대화를 통해 상호 필요충분조건을 확인했고, 어느 정도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있었다. 

                                                                                                                                                                   (다음호에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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