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소나무 숲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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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소나무 숲길에서
  • 손수자 수필가
  • 승인 2024.02.2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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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음박질치는 계절의 꼬리를 잡고 숨 가쁘게 따라온 한 해인 것 같다. 서툰  솜씨로 텃밭을 가꾸고 가을걷이를 하기까지 허둥대는 사이에 어느덧 겨울의 문턱을 넘어섰다. 텅 빈 밭이 허전하다. 애지중지 키워온 자식들을 외지로 출가시킨 부모의 마음이 이러하리라.


월동준비를 마치고 금강소나무 숲에 드는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숙제를 다 한 홀가분함이랄까. 어성전 숲 교육관 옆으로 난 등산길 계단을 오른 후 잠시 걸음을 멈추고 숨 고르기를 한다. 돌아서서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니 가파르고 아득하다. 오르기 전 올려다보았던 느낌과 사뭇 다르다. 이 계단을 한층 한층 오르면서 경사도를 실감하지 못했나보다. 뒤돌아보니 내가 살아온 길도 힘든 줄 모르고 한 계단씩 올라온 삶인 것을…. 발걸음을 옮겨 완만한 산허리를 돌아 걸으니 낙엽 밟는 소리가 오솔길을 따라온다. 이럴 때 그럴싸한 즉흥시 한 수 읊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내 부족한 어휘력이 가슴 속에서 일렁이는 감성을 감당치 못해 안타깝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헐벗은 나무들의 살 떠는 소리에 마음이 시리다. 하지만, 그들 곁에 서 있는 늠름한 금강소나무가 세찬 바람을 막아 주어서 미덥다.


산 중턱을 지나 조금 더 오르자 새로 지은 아담한 정자가 나타난다. 여기는 시끌벅적하게 한판 벌일 음주 가무의 자리가 아니다. 금강소나무와 벗이 되어 낭랑한 음성으로 시조라도 한 수 읊을 선비의 자리다. 정자에 올라앉았다. 어성전 마을의 집들이 옹기종기 저만치 내려다보인다. 잎이 무성한 계절에는 볼 수 없는 정경이다. 겨울 산은 이렇게 속속들이 보여주는 솔직함이 있어서 좋다. 


산 정상에 올랐다. 멀리 보이는 백두대간의 곡선이 부드러운 손놀림으로 그린 그림처럼 유연하다. 마주 보는 능선에 엉성한 깃털을 곧추세운듯한 헐벗은 나무들은 겨울 산의 또 다른 매력이다. 나목들이 푸른 하늘에 그린 그림은 참으로 섬세하고 아름답다. 소나무가 비켜선 자리에 굴참나무, 서어나무 등 활엽수가 잎을 떨구고 마련한 여백의 미이다.


내려오는 길에 부부 소나무를 만났다. 백 년여의 세월을 살아옴 직한 낙락장송이다. 그들은 멋들어진 손을 휘휘 저으며 나를 반긴다. 이 두 그루의 소나무는 나의 애인과도 같은 존재였다. 힘겹게 산을 오르다 소나무를 감싸 안고 얼굴을 기대면 언제나 편안하게 맞아주었다. 양팔을 벌려 두 소나무를 짚고 깊은숨 토해내면 몸은 날아갈 듯 가벼워졌었다. 우리는 그렇게 정이 들었다. 그런데 지난여름, 우리 집에 온 문우가 두 소나무를 부부의 연을 맺어주었다. 이들은 긴 세월을 홀로 지내다가 짝을 만나니 행복한 모양이다. 어느덧 아기 소나무도 엄마, 아빠 곁에서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정겨운 소나무 가족이다. 내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절로 흐른다.


등산길을 내려와 숲 체험장 야외 교실 의자에 앉아 잠시 이곳 식구가 되어본다. 훤칠한 몸매, 늠름한 모습을 갖춘 금강소나무가 적당한 간격을 두고 나를 에워싼다. 언제 봐도 멋지다. 그 앞에 서면 마치 옛날에 그려보았던 내 이상형을 만난 듯 가슴이 설렌다. 금강소나무들은 긴 세월 동안 버려야 할 것을 스스로 가지치기하는 아픔을 견디며 살아온 올곧은 삶이다. 그래서 더욱 우러러 보인다. 


솔가리 위에 사뿐 올라앉은 솔방울 한 개를 집어 들여다보았다. 비늘 조각이 모두 벌어져 있다. 솔 씨는 이미 어디론가 날아가서 뿌리를 내리고 있을 것이다. 솔 씨가 우리 집 뜰에 날아들어 아기 소나무로 자라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귀여운지! 여기저기에 금강소나무의 후계목이 자라고 있어 장래가 밝다. 경복궁과 숭례문 복원에 사용된 삼척시 준경묘 부근 소나무처럼 이곳 금강소나무도 나라의 큰일을 맡게 되지 않을는지….
금강소나무 사잇길을 따라 집으로 향한다. 솔향을 머금은 마음이 솔가지에 날아오른다. 머리가 맑고 기분이 상쾌하다. 금강소나무 숲길을 걸으며 사색하는 시간이 나를 풍요롭게 한다.

쓰임 돌

마당에 놓을 징검돌이 모자라서 몇 개를 보충하기 위해 집 앞 계곡으로 내려갔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마음에 드는 돌이 많지 않다. 모양이 예뻐서 돌을 들어보면 밑면이 일그러져 있고, 돌 색깔이 좋으면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물가를 오르내리기를 여러 번, 쓸 만한 돌 몇 개를 겨우 찾았다.


나에게 선택된 돌은 우리 집 마당으로 옮겨져 디딤돌이 되어 발에 밟히는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잔디를 보호하는 임무를 맡게 되니 보람되지 않을까. 선택되지 못한 수많은 돌은 때때로 세찬 물살에 시달리거나 떠밀려 굴러가야 한다. 그러나 모난 곳이 깨어지고, 깎이는 고통을 감내하다 보면 더 좋은 곳에 쓰임 받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안목 있는 어느 수석 수집가의 눈에 띄어 귀한 자리에 올라앉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보폭을 어림하여 징검돌 놓을 자리를 호미로 움푹하게 팠다. 땅을 팔 때마다 크고 작은 돌들이 박혀 있어서 힘이 들었다. 호미로, 곡괭이로 파낸 돌을 한쪽에 버리고 징검돌을 놓은 후 빈틈을 흙으로 메웠다. 그리고 징검돌 사이에도 잔디를 심어 마무리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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