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시인의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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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시인의 기행
  • 김묘순 충북도립대 겸임교수
  • 승인 2024.02.29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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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도리질에 이어서)

여름이다.
마땅히 쏘다닐 겨를이 없는 내게, 악필로 빼곡히 채운 하루를 안고 무작정 짙푸르게 달려보는 일이란 신나는 일이다.


길을 가다가 마주친 30년 전 기억들. 그땐 차마 꺼내지 못했던 늦은 이야기들. 그것들을 주섬주섬 담아 또박 또박 도화지에 그린다. 비록 그것이 수신인 없는 편지가 될지라도 나는 어김없이 하루를 위로하며 그려내야만 한다. 그것이 늦은 안부가 되어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머무르고 말지라도. 나는 어김없이 또 하루를 그리고, 쓰고, 다듬어야만 한다. 온종일 해를 만난 적 없어 궁기마저 채울 수 없는 날에도 나의 그리기는 멈출 줄 모른다. 하품이 찾아오는 따분한 하루여도 나는 그것을 강렬한 언어로 바꾸어야만 하고, 풀리지 않는 수학문제 앞에서 지루했던 하루마저도 온전하여야만 한다. 


나는. 온통 젖은 나의 하루를 경건히 위로하는 그런 여자이어야만 한다. 뿐만 아니라 나는 한없이 고요로운 여자이어야만 하기 때문에 자꾸만 나의 하루가 눈에 밟힌다. 아니, 내가 나의 눈에 밟히는 이유는 모호한 언어로 비뚤어진 경계마저도 허물어야만 하는 직업을 가진 여자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나의 펜 끝에서 젖어드는 다듬어진 언어들은 누군가에게 다가가 르네상스로 부화되어야 하고, 돌아갈 기약 없이 사라져 버린 고향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나는 길들여진 언어들을 하늘 끄트머리에 대롱대롱 매달 수 있을까? 그것은 위대한 목표가 아니어도 좋다. 단 한 사람을 향해 꺼내지 못하고 묻어 두었던 상처받은 편린들. 그 조각들이 하늘가에 햇살로 뜨겁게 부셔져 내린 날이 있었으면 마땅할 뿐이다. 나는 내가 아닐 수 없고, 불은 불이 아닐 수 없듯이 세월은 시간이어야 하고 바람은 불어야만 한다. 그 바람의 광활한 기적을 바라며 기다려야만 한다. 그 기다림은 공허한 메아리로 정수리를 치받아도 기다림의 가장자리를 지켜내며 기다려야할 것이다. 저만치 뒷짐 지고 기다려주지 않는 진리의 회초리를 저물도록 기다리다 돌아서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슬픔의 뿌리를 캐내며 진리가 떨구고 간 희망의 이삭을 주워 담아야 할지도 모른다. 


더러는 누룽지처럼 붙어있는 진리의 덩어리를 멀리 밀어낸 바람을 맞으며 한 줄의 시를 쓸지도 모를 일이다. 나도 산처럼 물처럼 맑아지고 싶다. 서릿발처럼 고요로운 도도함을 지키는 내가 쓴 한 줄 시를 지구 위에서 만나고 싶은 날이다. 통영은 조용하나 바쁘다. 해안로와 바다가 보이는 통영식도락에서 해물뚝배기와 멍게비빔밥을 먹었다. 미처 덜 벗은 장화 속까지 바다가 따라온듯한 어부들이 옆 좌석에 자리 잡는다. 가끔은 억센 경상도 사투리가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태반은 못 알아듣겠다. 그래도 식당 여직원 두 명은 이들과 대화를 썩 잘 한다. 나는 이곳에서도 이방인임을 깨닫는다. 

 14. 논개는 우리의 할머니
빈한한 사람들, 어여쁜 딸을 둔  「진주(晋州) 1」

논개는 촉석루에서 왜장 게야무라(毛谷村)를 안고 남강으로 투신한 충의 애족애국의 일념이 만고 미담으로 영원히 빛날 것이라고 정지용은 서술하고 있다. 주달문의 딸이라는 논개는 아버지의 별세 후 장수 현감 충의공 최경회의 후처가 된다. 임진왜란에 그녀는 최경회의 의병 활동을 도왔다. 1593년 최경회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임명, 순국하자 적장을 안고 투신한 열녀다. 유몽인의『어우야담』에 “논개는 진주 관기였다. (중략) 논개는 미소를 띠고 이를 맞이하니 왜장이 그녀를 꾀어내려 하였는데 논개는 드디어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에 함께 뛰어들어 죽었다.”라는 내용을 근거로 논개는 기녀로 알려졌다고 한다. 그러나 1987년 해주최씨 문중에서 발간한 『의일휴당실기』에는 “공의 부실(副室)이 공이 죽던 날 좋은 옷을 입고 강가 바위에서 거닐다가 적장을 유인해 끌어안고 죽어 지금까지 사람들은 의암이라 부른다.”고 적고 있다. 이것을 근거로 논개는 최경회의 후처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는 논개가 열녀임을 입증하고 있는 셈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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