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리정신을 실천한 송상민 주자 성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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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리정신을 실천한 송상민 주자 성리학자
  • 전순표 옥천향토전시관장
  • 승인 2024.03.07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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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사람 스승 송시열 선생, 변호상소로 목숨 바친 직제자

석곡 송상민(宋尙敏) 선생은 조선 후기 유학자이며 극진한 효자로 충, 의, 효의 절의정신을 실천한 주자 성리학자이다. 『석곡봉서』를 저술하였으며, 송시열 선생의 직제자로서 우암 선생이 유배되자, 억울함을 상소하였다가 목숨을 바친 만세에 귀감이 되는 성리학자이다.  


그의 자는 자신(自愼)이고 호는 석곡(石谷)이다. 본관은 은진 송씨로 동파공 송여익(宋汝翼)의 6대손이다. 1626년(인조 4년) 호군공 송시흥(宋時興)의 외아들로 회덕현(현재 대전시 대덕구) 읍내리에서 출생하였다. 우암 송시열 선생과 동춘당 송준길 선생의 문인이며 직제자로 어린 시절에는 서기(徐起) 선생에게서 배웠다.

조대비 복제문제, 남인 2차 예송당쟁

 1660년(헌종 1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송시열 선생의 거처인 회덕 소제동에서 주자성리학 학문 연구에 진력하였다. 1674년(현종 15년)에 효종 비인 인선대비가 죽자, 모후 조대비의 복제 문제로 남인인 윤휴와 허목 등이 2차 예송(禮訟) 논쟁으로 사화를 일으켰다.

이때 남인들로부터 거듭된 집중 공격으로 송시열 선생은 1675년(숙종 1년) 1월 13일 함경도 덕원(德源)에 유배된 이후 이해 6월에 남인들의 맹공을 받아 경상도 장기로 이배되었고, 1677년(숙종 3년) 3월에는 유배지인 경상도 장기에서 부인 이씨(李氏)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덕원, 웅천,  장기, 거제, 충청도 청풍 등지로 귀양살이를 하다가 풀려 나왔다. 그리고 삭탈관직도 당했다. 

스승변호 상소, 「석곡봉사」 올린 죄 장살

남인이 과거에 일단락되었던 예송 논쟁을 다시 꺼내들어 이것을 빌미로 송시열을 재차 역모로 몰아가려 하자, 송시열을 두둔하는 상소가 올라왔다. 그 중 송시열 선생의 제자이며 대전 회덕의 유생인 송상민이 1679년 음력 3월 12일 예송 논쟁의 전말을 정리하여 책으로 엮은 《석곡봉사》를 지어 임금에게 올리면서 송시열의 처벌이 부당함을 호소하며 송시열의 구명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송상민의 변호 상소에 대하여 영의정 허적(許積)의 탄핵으로 냉혹하게도 숙종은 송시열 스승을 구명하려는 직제자 송상민을 궁궐 앞에서 태장으로 맞아 죽게 하였다. 


허적으로부터 탄핵받아 공사에서 진술하는 송상민이 말하기를 “예론(禮論)을 들지 않으면 원통함을 송사할 수 없고 스승의 원통함을 풀지 못하면 사람 노릇을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혹독한 태장 형벌을 받았으나, 안색이 태연하여 마침내 목숨을 잃었으니, 1679년(숙종 5년) 그의 나이 54세였다.


이후에도 남인들은 다시 송시열을 죽이기 위해 종묘에 고하는 일을 계속, 주장하였다. 한편 송시열 선생이 유배되자 성균관을 중심으로 한 서인계 유생들이 송시열의 ≪차자 기년설≫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우암 선생에 대한 구명운동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1680년(숙종 6년) 봄에 남인의 탁남 영수 허적을 비롯한 남인 일파가 정치적으로 대거 실각당한 경신대출척(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1680년 6월 송시열 선생은 석방되어 귀향하였다. 그리고 송상민 선생은 공조좌랑에 추증되었다. 회덕(대전)지방 유림인 송유, 박팽년, 송갑조 선생의 위패를 모신 대전 동구 정절서원에 1684년(숙종 10년) 송상민 선생도 추가 배향되었다. 1699년(숙종 25년)에 효행으로 고향 회덕에 정려문을 세웠다. 그리고 1873년(고종 10년) 좌의정 송근수에 의해 송상민 선생의 일을 상소하여 종3품 사헌부 집의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석곡봉서(石谷封書)』가 있다.

생삼사일은 부모, 임금, 스승 섬김은 하나다

석곡 송상민 선생은 호걸풍의 성리학자로 “생삼사일(生三事一)이라고 나를 낳은 사람은 셋인데 섬기는 도리는 하나다”라는 주자 성라학의 절의정신을 실천한 유학자이다. ≪생삼사일(生三事一)≫ 즉 부모는 나를 출생하게 하셨고, 임금은 나를 살게 해주고, 스승은 나를 가르쳐서 살아갈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에 세 분 섬기는 도리는 똑같다.


그러므로 군사부일체의 의리를 익혀 강구하여 효도에 있어서 이미 힘을 다하였다. 그리고 충성에 있어서도 그 충절을 다해, 유학의 최악의 운을 당하여 스스로 자기 몸을 사랑하지 않고 죽음으로써 생삼(生三) 제자의 도리에 보답하여 사람의 의리를 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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