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시인의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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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시인의 기행
  • 김묘순 충북도립대 겸임교수
  • 승인 2024.03.28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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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서)
어느 날 밥을 가지고 미군 포로를 찾았다. 그는 아버지께 “이제 고생 다 했다. 내일이면 끝이다. 이젠 미국으로 가자.”고 연신 아버지를 설득했단다. 아버지의 대답은 역시 “No”였다. 그러니 미군 장교였던 포로는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아버지께 풀어 주며 징표를 삼아달라고 하였단다. 그러나 그 시계를 차마 받을 수 없어서 돌아선 다음날 해방이 되었단다. 

해방이 되니 그동안 한이 맺혔던 한국노동자들이 일본인을 잡히는 대로 때리고 얼렀단다. 일본인들은 어디로 숨었는지 알 수 없고 그들을 찾는 한국인들만이 해방의 기쁨을 일본 땅을 휘저으며 맛보았단다. 그리고 그동안 노동으로 모아둔 돈을 다 한꺼번에 거두었단다. 배를 사서 한국에 오고자 함이었다. 일본인 선장을 한 명 섭외해서 무사히 우리를 한국땅에 데려다 준다면 이 배는 가지고 일본으로 다시 돌아가거라. 그리고 그 배도 당신 가져라. 이러한 조건을 받아들인 일본인이 한국인 노동자들을 싣고 한국으로 왔다고 한다. 그런데 부산항이 보였는데도 이틀을 항구에 정박하지 않고 계속 바다를 항해만 하더란다. 그 당시 일본인은 한국인 눈에 띄면 사망이란 것을 익히 알고 있는 지라 선장이 꼬리를 내렸던 것이리라.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 갑자기 이제 다 내리라 해서 내려보니 진주였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 선장은 “똥 빠지게 도망갔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그곳이 어디든지 상관없더라고 하였다. 한글이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한국임에 틀림없으니 여간 좋지 않더란다. 그래서 또 이레를 걸어서 집에 도착했단다. 

아버지는 돌아가실 날을 며칠 남겨두지 않았지만 일본인을 혼내주는 장면에서 신이 나셨고, 모아둔 돈으로 일본인 선장을 사서 집으로 돌아가자고 이야기할 때도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군 장교였던 포로는 어찌 살고 있는지 궁금해 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그리고 고마움의 표시로 손목시계를 풀던 인정 있던 미군 포로를 그리워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 아버지는 그리워하던 미군 포로도 영영 못 만나고 그냥 그리움만 간직한 채 한 점 구름으로 남았다.   

진주 촉석루에 찬바람이 분다. 

아버지가 해방이 된 후 일본 선장을 앞세워 배에서 내렸다는 곳은 어디쯤일까? 가만히 눈으로 가늠해 본다. 바람을 몰고 온 구름이 말없이 지나간다. 하늘은 빈 원고지처럼 휑하다.

18. 월이와 일향의 사랑이야기 
「진주(晋州) 5」는 정지용이 행방불명된 후 발표된 마지막 기행산문이 되고 

“평양기생들은 빈손으로 타향에 나가서 집을 장만하고 살림을 장만하건만, 진주기생은 트렁크에 돈을 가득히 담고 나간다 할지라도 나중엔 빈손으로 고향 찾아온다”고 「진주 5」에서 정지용은 서술하고 있다.

그는 1950년 6월 28일 「국도신문」에 이 작품을 마지막 기행문으로 발표하게 된다. 그는 6ㆍ25한국전쟁 당시 녹번리 초당에서 설정식 등과 함께 정치보위부에 나가 자수형식을 밟다가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러나 이 기행산문은 미리 정리해서 신문사에 보냈을 것이다. 그래서 6월 28일까지 지면에 발표되었던 것이리라. 경부선을 타면 옥천과 영동을 지나게 된다. 정지용도 그 당시 이 길을 지났을 것이다. 기찻길에서 바라다 보이는 곳에 일향산과 월이산은 자리하고 있다. 그도 이 산들을 바라보며 일향과 월이를 생각하였을 법하다. 

기차는 정지용이 지났던 길을 하염없이 기적도 울리지 않고 지난다. 햇볕이 눈에 따갑도록 시리다. 그리고 한 줌 흙이 기절할듯 이별로 아프게 다가온다. 그 이별들 속에서 나는 한 원로 향토사학자께 들은 월이와 일향이의 슬픈 사랑이야기를 뇌리에 상정한다. 그것이 산과 들에 산재해 있는 가벼운 입김 같아도 돌아갈 기약 없는 전설로 남겨진 월이와 일향이의 애절한 사랑이야기. 그 이야기는 두고두고 내 의식을 타고 흘러 멈추지 않는 존재로 남는다. 

그들의 끝나지 않을듯한 숨가쁜 사랑과 외로운 사랑이 깜깜한 밤 숲길로 이어진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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