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 미술에 대한 그리움… 1996년 귀향 미술 활동 전념
정 화백 작품에 등장하는 소… 조연 아닌 온전한 주인공
똑같은 사물이나 풍경이라도 그림을 그리는 작가의 성향과 철학에 따라 그 그림은 세상에 각기 다른 모습으로 공개된.다 어떤 그림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기도 하고 어떤 그림은 사람의 심성을 온화하게 만들기도 한다. 또 어떤 그림은사 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 감상하기가 꺼려지는 그림도 있다. 옥천읍 한 작업실에서 40여년이 넘는 화업에서 터득한 중년의 완숙미와 청년의 혈기, 소년의 순수함을 캔버스에 풀어내고 있는 정천영(58)화백을 만나봤다. <편집자주>
평생 일만하는 소의 영혼 위로하기 위해.
서양화가 정천영(58) 화백. 유년시절부터 줄곧 그림 그리는 일에만 몰두를 해온 작가다. 가난을 벗 삼아 ‘그림쟁이’ 외길만을 걸어왔다. 이제껏 ‘소’를 소재로 한 그림만을 그려왔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작가이기도 하다. 그가 유독 그림에서 소만을 소재로 집착하는 이유가 궁금하지않을 수 없다.
‘소’로 각인된 그의 그림에서 소는 우직하고 성실하게 일을 하는 모습은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여유로움과 느긋함을 즐기는 유유자적한 소의 모습만이 보일뿐이다. 그의 소는 노동의 상징적 의미인 코뚜레도 하질 않았고 쟁기를 끌기 위한 멍에도 없다.
정 화백은 “유년시절 소의 대한 느낌은 항상 쟁기질을 비롯해 농사일만 하는 모습으로만 기억됐다”며 “그 당시 소의 모습으로 떠올리다 보니 노동에 지친 소보다 한적한 소의 모습이 매력적으로 느껴져 소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달을 품거나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잠을 청하거나 꽃과 새에 둘러싸여 편안한 자세로 그의 그림 속에 소는 몽환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의 소 그림 작품은 특이하게도 캔버스나 사각의 틀이 아닌 전통적인 문틀에 작업을 한다.
정 화백은 “평생 일만 하다가 죽는 소들의 영혼을 위로해주는 의미로 내 그림속에서만이라도 자유롭고 한가로운 소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전했다.
유년시절그림 그리기에 소질 있어.
넉넉해 보이는 풍채와는 달리 정 화백은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옥천읍 양수리가 고향인 그는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걱정이 항상 앞섰다. 그런 정 화백은 가족을 위해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지만 그림 그리기를통해 스트레스와 걱정을 잊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기에 소질이 있던 그는 당시 소년 중앙 등 소년 잡지에 실린 만화나 그림을 따라 그리면서 그림을 익혔다. 타고난 소질로 금방 그림을 익힌 그는 삼양초등학교와 옥천중학교를 졸업하고 대전상업고등학교를 다니다 서울로 전학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그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들 몰래 그림을 그리다 꾸중도 종종 들었다는 정 화백은 “당시 학교에서 친구들이 내가 그린 그림을 보면서 상당히 부러워하기도 했다”며 “공부와 생계를 위해 돈이 많이 들어가는 그림은 염두에 둘 수 없었지만 타고난 재능을 버리기가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고 말했다.
상업미술과 미술학원경영으로 많은 돈 벌어.
배를 곯는다는 이유 때문에 부친은 ‘환쟁이’라 치부하며 그의 그림 그리기를 극구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1988년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한 때 화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법학도로 10여년간 고시공부에도 매달렸지만 넉넉지 않은 생활 때문에 공부에만전념할 수 없던 그는 그림 그리는 아르바이트로 공부할 돈을 마련하면서 고시공부를 연명했다.
하지만 고시공부도 그림도 매진할 수 없는 상황에 정 화백은 많은갈등을 했다. 소위 말하는 출세를 위해 고시공부를 하면서도 항상 자신의 주변을 맴돌던 ‘타고난 재주’를 외면하기 힘들어 고시공부를 포기하고 화가의 길을 선택하게 됐다.
정 화백은 “고시공부를 연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나의 재능을 낭비하는 것이 너무 괴롭고 힘들었다”며 “비록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돈과 출세보다 그림으로 인정받고 싶어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고 말했다.
마음을 굳힌 그는 우선 아르바이트로 하던 상업미술세계에 종사하며 많은 돈을 벌었다. 하지만 상업미술을 하면서 그림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고 작품으로써 가치도 없는 그림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게 되면서 서울 쌍문동, 수유리 등지에서 학원을 경영하며 미술을 배우려는 학생들을 지도하게 됐다.
정 화백은 “상업미술로 돈은 벌었지만 미술공부를 할 수도 없고 내 작품에 대한 자부심도 가질 수 없어 계속해야 되는 의구심이 들었다”며 “우선 모은 돈으로 미술 학원을 차려 학생들도 가르치고 나도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한참 가르치는 것에 재미를 느끼고 가르친 아이들의 성적도 향상되면서 학부모들에게 입소문이 퍼져 강남, 서초 등으로 개인교습으로 출장까지 가면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었다”고 덧붙였다.
아버지의 이해로 죄송스런마음 덜어.
정 화백은 상업미술과 미술교육에 종사하면서 순수 미술에 대한 그리움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의 순수 미술에 대한 동경은 경영하던 미술학원을 무작정 접으면서까지 본인의 미술세계 추구와 작품 활동에 매진하기 위해 1996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옥천으로 돌아오게 됐다.
옥천에 와서도 한 동안은 편견과 부친의 반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지만 주변에서 예술에 대한 그의 열정과 재능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차츰 이름을 알리며 인정을 받기 시작하자 방송, 신문 등에 소개가 되면서 부친이 어느 정도 이해를 해줬다.
정 화백은 “평생 동안 죄송스러운 마음뿐이었는데 늦으나마 아버지의 이해와 인정으로 작품 활동에 더 매진할 수 있었다”며 “아버지의 이해가 없었다면 옥천에서 자리를 잡는데 시간이 더 걸렸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역문화발전에기여하고 싶어.
정 화백은 그림에 대한 애착 하나로 세상살이 욕심을 거두고 살아가고 있다. 혹자는 그런 모습을 영락없는 소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우직하지만 성실하고, 온순하지만 끈질기며, 힘이 세지만 사납지 않은 소의 매력이 그의 순박한 예술에 대한 의지를 보여준다.
정 화백은 “소는 늘 희생을 강요받으며 노동력을 제공하는 삶을 견디고 있다. 세상이라는 굴레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흡사 비슷하다고 생각한다”며 “평생토록 일만하고 죽으면 그 몸뚱이마저 내놓아야하는 소에게 안식과 자유를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작품 속에 등장하는 소는 달나라에도 가고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나무 위에도 천연덕스럽게 휴식을 취하기도 한다. 또 똬리를 튼 뱀처럼 서로 뒤엉켜 있기도 하고 두 마리의 소가 태극으로 돌아가는 모습도 보이기도 한다.
이렇듯 정 화백의 작품 속에 나오는 소는 일반적으로 농촌 풍경에 등장하는 조연이 아닌 소 자체가 주제고 온전한 주인공이 된다. 많은 소를 그렸지만 그리고 또 그려도 그에게 소는 작품의 무한한 소재이자 삶의 일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 같은 그의 소는 ‘소 그림’에 대가라 일컫는 이중섭 화백 작품의 소와는 다르다. 미술에 조예가 깊고 그의 작품을 추종하는 신동인 시인은 “이중섭의 소와 정천영의 소가 가지고 있는 힘을 비교해보면 이 화백의 소는 내성적인 힘이 뿔과 허리, 꼬리 등 외면으로 뿡어져 나오는데 비해 정 화백의 소는 내성적인 힘이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는데 차이가 있다”며 “결국 이 화백의 작품에 등장하는 소가 반항으로서의 의미라면 정 화백의 그림 속에 소는 자기 정화라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옥천군지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정천영 화백은 11번의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2005년부터 지역문화발전과 지역민들을 위해 군집 개인전에 참여하고 있다. 또 민예총 옥천군지부 미술분과 회원들과 지역행사인 지용제, 묘목축제, 옻나무축제 등에 참여하며 방문객들에게 옥천미술을 알리는데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