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막살이 정승과 이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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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막살이 정승과 이공상
  • 강준회 前중부매일 논설위원
  • 승인 2017.01.19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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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에 ‘키 작은 정승’이라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정승이 있었다. 그는 번잡한 데 가지 않고 공적이 아닌 일에는 깊이 관여치 않았다. 나라에 봉사할 시간도 많지 않은데 허튼 데 가서 오해받고 정력을 낭비하고 자기의 중심을 흩뜨려 놓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똑바른 길로 가기도 바쁜데 왜 비틀비틀 곁길로 가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본디 율곡 이이(李珥)선생이 인정을 하여 벼슬길에 올라 더욱 큰 자리로 나갈 수 있었다. 대인은 대인(大人)을 알아보는 법이니, 나도 잘 나야 하지만 잘난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것이다. 그는 평안도 안주(安州)목사로 간 적이 있는데 백성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고, 곡식 종자를 개량하게 하였다. 또 ‘이 고장 사람이 뽕나무를 기를 줄 모르다니… 추운 지방이지만 누에치는 방법을 가르쳐야겠다’며 실질적인 중농(重農)정책을 폈다.

그래서 안주지방 사람들은 더욱 근면해졌고, 중국(中國)과 무역도 했으며 생활이 나아지고 비단 옷을 입을 수 있었다고 그의 성(姓)이 이(李)씨 인지라 뽕나무를 이공상(李公桑)이라 불렀다. 그는 선조 왕을 모시고 임진왜란을 겪은 영의정이고, 광해군에게 직언을 하고 귀양을 간 영의정이며, 인조반정(仁祖反正)때 새 정부의 영의정을 지내는 등 모두 다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다.

인조반정후 ‘폭군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을 때 ‘그렇다면 그 아래서 영의정을 지낸 나부터 죽여라’해서 광해군을 살렸다. 나이 80에 가까울 때 이괄의 난을 만나 왕을 공주까지 모셨고, 병조호란 때는 80 나이에 세자와 왕을 모시고 훈련감제조라는 벼슬에 있었다. 그의 집은 서울 호동이라는 곳에 있었는데, 근처의 산(山)을 지키는 산지기가 새로 들어왔다.

하루는 산지기가 소나무를 베어가는 한 아이를 붙잡아 산(山)아래 두어 칸 오막살이로 끌고 갔다가 보니 다 떨어진 옷을 입은 초라한 노인(老人)이 자리를 치고 있었다.

“영감 이 아이를 좀 잘 붙들어 두시오. 내 말이 안 들려요. 이 애가 국법을 어겼단 말이오. 이 아이를 잃어버리는 날에는 혼날 줄 아시오. 그런데 왜 거만하게 아무 말도 않고 있는 것이요. 내 말이 말같지 않소. 알겠소, 영감?” “알겠소.”

산지기가 돌아가자 노인이 울고 있는 아이에게 말했다. “이제 산지기가 갔으니, 너도 가거라.” “안가겠습니다. 가면 노인께도 화가 미칠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벌을 받겠습니다.” “아이야, 소나무도 재목으로 중하지만, 나는 네가 나라의 재목으로 더 중하단다. 나무는 베면 또 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자 안심하고 어서 가거라.”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안녕히 계십시오.”

이튿날, 산지기가 왔는데, 아이가 있을 턱이 있는가, 노발대발해서 영감이 대신 국법을 받아야겠다고 호통을 치는데, 의정부(議政府) 하인이 와서 “이놈, 이 어른이 왕평부원군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1547~1634)정승이야. 어디서 감히….” “정승이 왜 이렇게 못살아요.

왜 나를 홀려요?”하더란다. 이런 조상을 둔 우리는 행복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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