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을 앞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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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을 앞두고
  • 채상임 시임
  • 승인 2017.01.26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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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이 하얗게 덮였다. 방송을 통해서도 예측은 했었지만, 농업기술센터에서도 폭설에 대비하라는 문자를 보내왔다. 며칠 전 어린 외손녀가 왔다가 “할머니! 겨울이 왜 이래요? 눈도 안 오고?” 창밖을 내다보며 떠들던 말이 생각났다. 가물다는 생각도 있었으나 나도 눈 내리는 풍경이 보고 싶어서 은근히 눈을 기다리고 있었다.

밤에 내린다고 했으니까 내가 잠잘 때 하얗게 쌓였다가 아침에 눈을 뜨고 창문을 열면 세상이 눈부시게 변해 있겠구나 생각 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잠을 청했었다.

정말 아름다운 아침이었다. 하얀 세상을 만들어 놓고 눈은 여전히 살포시 내리고 있었다. 이런 기세로 내리다가는 애들 출근길에서부터 포도밭 비닐하우스까지 여러 가지가 문제가 되겠구나 하며 생각은 다시 현실로 돌아가고 말았다.

다행히 쉽게 그쳐 주어서 피해는 없었지만, 눈 치울 일이 걱정이었다. 예전 같으면 동네에 어른들, 아이들, 모두 나와 눈을 쓸고 눈사람을 만들고, 개들도 나와 뛰어 다니며 시끌벅적 했을 텐데, 아름답기는 하지만 고요하고 적막하기만 했다.

집 앞을 쓸고 있는 남편을 따라 뒤에서 한 번 더 쓸고 다듬으며 눈을 쓸고, 누렁이집까지 길을 내놓고 닭 집이 있는 곳까지 치우고 나니 하얀 숲속에 예쁜 오솔길이 되었다. 사람 다닐 길만 열어놓고서 조심스레 눈길을 다녀보고 싶었다.

멀리 앞산을 바라보니 눈의 무게가 나무를 힘겹게 하고 있다. 힘에 겹다고, 못 견디겠다고 할 때쯤 바람이 지나며 눈을 털어주었다. 무거운 짐을 내려주는 모습, 바람에게 또 한 가지 배워야 할 흐뭇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옷에 묻은 눈을 털어내고 집으로 들어오니 남편이 가래떡은 언제 할 거냐고 묻는다. 깜짝 놀라며 달력을 보니 설날이 열흘도 남지 않았다. 한 사나흘 더 있다가 해도 되겠다고 대꾸하며

설날이 다가오니 눈도 내리고 날씨도 겨울답게 추워지는구나 싶었다.

눈도 없이 포근하기만 하다면 오히려 설답지 않을 것 같아서 추운 날씨가 반가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결혼 전에는 설날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제사도 없었지만, 큰댁이 서울이어서, 더구나 여자여서인지 차례 참석을 하지 않아서 잘 몰랐던 거 같다.

그러다가 결혼해서 보니 금천리의 설날 준비는 보름, 아님 열흘 전부터 시작을 해야 했었다.

설날이 다가오면 날씨는 왜 그리 추웠던지, 개울에 나가서 얼음을 깨고 이불 빨래부터 해야 했다. 할머님 이불, 어머님 이불, 애들 이불. 모두 빨아서 꿰매 놓고 나면 제일 먼저 하는 음식이 집에서 두부를 만드는 것이고, 술과 식혜를 만들고, 곡식을 튀겨다가 강정을 만든다.

그리곤 약과와 가래떡을 만드는 모든 과정이 오늘은 이 집 내일은 저 집, 돌아가며 품앗이 하듯이 음식을 준비한다.

먹어야 할 사람이 많아서 인지 몰라도 집집마다 음식을 왜 그렇게 푸짐하게 했었는지 모를 일이다. 식구들이 많기도 했지만, 그렇게 준비 하느라고 부녀자들이 많이도 힘겨웠던 때였다고 생각이 된다.

그때만 해도 나눠 먹는 것이 미풍양속이라는 관습이 있어서인지 제사를 지내면 음식을 접시에다 골고루 담아서 온 동네를 돌려야 했고, 부모님 생일날이면 동네 어른들을 모셔다 대접 하는 일들, 지금은 사라지고 많이 일이 줄어져서 편안하게 살고는 있지만, 대문을 나오면 마주치던 이웃 어른들의 모습과 한때 북적대며 부딪히며 살아가던 그 때가 그리워진다.

골목길을 나오시며 뛰어노는 아이들에게 “이 똥 기계! 이리 와봐.”하시며 사탕을 나눠 주시던 머리가 하얗던 할아버지. 아기가 울면 논물 보러가는 길에 아기를 업고 갔다 오시며 돌봐 주시던 아주머니. 아이들이 넘어지면 일으켜 주시며 꾸짖는 듯 예뻐하시던 어르신들.

그 아이들이 자라서 모두 가정을 이루고, 그때 그만한 아이들을 데리고 설날이라고 돌아오겠구나 생각하니 흐뭇한 반면에, 어떡하다 그렇게 나이를 많이 먹었느냐는 네 살 난 손녀의 말이 생각나 서글퍼지기도 했다.

그렇더라도 다가오는 설날이면 떡국은 먹어야하고 나이도 먹어야 한다. 서글피 여길 일이 아니라 부모님 조부모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내가 사랑 받은 것처럼, 할머니라는 부름을 기쁘게 생각하며 살아가야 않겠냐고 다짐을 해본다.

따뜻하다고 걱정했던 겨울이었지만 눈이 쌓이고 보란 듯이 추워지고 있다.

추위를 무릅쓰고 찾고자하는 따뜻한 품, 누구에게나 돌아 갈 고향이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하다.

찾아오는 자손들도 행복한 일이지만, 음식을 나눠 먹으며 웃음꽃을 피울 자손들을 기다리는 마음도, 설날을 앞두고 흐뭇하고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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