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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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 조숙제 시인.수필가
  • 승인 2017.04.20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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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꿩이 마음 놓고 알을 낳는 봄밤이다. 언 동토를 그 스스로의 힘으로 녹여 대지는 지금 뜨거운 입김으로 부활의 노래를 준비하고 있다. 이 병든 몸에도 소진되지 않은 작은 엑기스에 취해 신바람 흥겨운데, 산골짜기에서 들려오는 새소리 물소리 구절마다 정겹다.

스스로 깊어가는 봄밤에 취해 지나간 필름을 뒤적여 본다. 나는 바람의 아들이었다. 아픈 청춘은 늘 방황과 번민의 밤으로 혼란스러웠다. 40여 년 전의 일이다. 청춘의 나이테가 갓 형성될 열여덟 고운 숨결이었다. 어머님을 순식간에 잃고 어린 동생들과 방황의 나날로 졸지에 가장의 신세로 전락한 나날이었다. 어머니 돌아가신 지 첫해의 봄밤이었던 기억이 난다. 참 많이도 아린 나날로 번민하던 기억이 새롭다.

그날도 여지없이 힘든 노동으로 몇 푼의 일용 할 양식을 벌었다. 거친 노동의 수고로움을 친구들과 어울려 몇 잔의 독한 술로 위무하는 중이었다. 못난 놈들은 그냥 얼굴만 쳐다봐도 흥에 겹다. 친구들과 몇 순배의 잔이 돌고 돌았다. 쉽게 취기가 전신을 휘감았다. 취기는 순간 서러움으로 변하는 것이 청춘의 덫이던가. 순간 울컥 감정이 솟구쳤다.

어머님의 잔잔한 미소가 술잔 속에 어른거리자 버림받은 자식처럼 나는 서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답, 나는 바람같이 꽃등처럼 하늘거리는 벚꽃 길을 따라 산마루에 닿았다. 숨결처럼 스쳐 지나가신 어머님의 그림자가 나를 순간 이곳까지 이르게 한 것이다.

명월이 만공산 할 제, 휘영청 달 밝은 달빛에 휘감겨 나만 홀로 이렇게 서럽단 말인가. 아니다,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었다. 깊은 산골짜기에서 이름 모를 산새도 목 놓아 울고 있었다. 우리는 전생에 진한 혈족이었나 보다. 한참을 넋을 놓고 먼 산을 바라다본다. 말을 잃고 묵묵히 앉아 있자니 목멘 달빛이 옷자락을 휘감는다. 피맺힌 정한으로 불러 보아도 돌아오는 반향은 묵묵부답이다. 바람처럼 스쳐 간 이름이여, 부르다 내가 죽을 이름 앞에 사위는 말이 없다. 서러움 가득 앉고 돌아오는 걸음걸음에 비탄과 자조만이 달빛에 채채히 내려앉는다.

그 이후론 어머니는 꿈속에서조차 만날 수 없었다. 냉혹한 현실에 강하게 적응하라는 어머님의 강한 메시지라 나는 생각하고 살았다. 이렇듯 내 젊은 청춘은 아팠다. 어머니라는 든든한 버팀목을 잃고 나서 참 많이도 방황했다.

이제 사 돌이켜 생각해보니 아련했던 추억의 감회가 새롭다. 그 쓰라린 인생의 뒤안길에서 어떻게 고비를 넘겼는지 의구심이 많은 봄밤이다. 어려운 환경을 능히 극복하고 삶의 나침반으로 긍정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던 기저는 과연 무엇이었던가. 가난과 고통의 뒤안길도 지나고 나니, 모두가 보석처럼 빛나는 재산이었음을 재삼 되새겨 본다. 시련의 고비마다 발갛게 피어올랐던 열꽃 앞에서, 당당하게 나를 지켜준 것은 내 안의 긍정의 힘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내 청춘의 필름이 그렇게도 캄캄하고 우울했건만, 지금 자꾸만 그리워지는 것은 무엇일까? 남에겐 쉽게 보일 수 없는 역경의 과정이었다. 그렇지만 그 질곡의 가슴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한 그루의 나무가 희망이라는 점멸등을 계속 깜박거렸기에, 오늘의 내가 존재치 않았나 생각된다. 이 만화방창하는 봄밤에, 불현듯 스쳐 간 회고록에 잠겨 옛 노랫가락에 젖어본다. 서러웠지만 지울 수 없는 나의 노래가, 이제 사 빛을 발해 알 수 없는 힘을 안겨준다.

 

늙은 고목에도 새순 곱게 돋아, 숨어서 사는 이 끙끙 앓는 꽃피는 봄밤이다. 꿈결 같은 지난 세월 마디 굵은 꽃받침 위에 살짝 앉아 보았다. 엷은 미소가 스쳐 지나간다. 스스로에 대한 맑은 눈망울로 빛나는 밤이다.

‘고맙소, 잘 견뎌 주어서.’ 불끈 힘이 솟는다. 달빛이 꽃가루 휘감고 창가에 놀러 와 부딪친다. 몸은 비록 병들고 지쳤지만, 모두가 고맙고 감사한 봄밤이다. 오늘 밤 꿈결엔, 어머님 손잡고 복사꽃 만발한 동산에서 마음껏 봄놀이할 것 같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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