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이 넘치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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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이 넘치는 세상
  • 황법명
    수필가
  • 승인 2017.06.01 10: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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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사이 말 중에 “인정이 밥 먹여주느냐”는 말이 있다.

   악착스러워야 살고 매정스러워야 손해를 안 본다는 말로 풀이할 수 있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안면 몰수해라. 잔인스러운 세속의 비어들도 있다. 인정은 흘러간 시대의 낡은 관념이요, 작금의 세상은 지독스럽게 이기주의적인 사람이라야 산다는 말 같다. 그러면 그 다음이 문제다.

  모두 자기만 위하고 자기중심의 세상을 산다면 이 세상은 장차 어찌될 것인가?

  그토록 악착스레 살면서 무엇을 남기자는 말인가? 무엇하러 이 세상에 온 것이냐? 새삼스럽게 삶의 목적을 관조해본다. 그토록 인정머리 없이 살고 난 후의 결과는 무엇이란 말인가?
옛날에도 참답게 생활이나 진리를 찾는 생활보다는 당장의 현실을 중요시하고 물질적인 것만이 귀한 것인 양 여기 온 일화나 민화들이 많이 있었다. 어릴 적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웠다.
  천자문 가운데 ‘질그릇 도(陶)’자가 있었다. 그 글을 가르치시던 선생님이 이런 일화를 말씀하셨다.

  옛날 어느 곳에 가난한 노부부가 만득의 아들을 서당에 보내고 있었는데 그 아들이 응석받이로 커서 글을 건성으로 배운 나머지 이 ‘질그릇도’자를 잘못 읽어서 ‘꼬기요 오’라고 읽었다.
옆에서 아들 글 읽는 소리를 듣던 노 양주는 무식하기 때문에 신기한 글자가 있구나 싶어서 “얘야, 한문에 참 별스런 글자도 다 있구나.”하고 감탄하자 신이 난 아들은 “어머니, 한문에 그런 글자만 있는 게 아니라 더 우스운글자도 있어요.”하면서 ‘가다듬을 려(勵)’자를 ‘가다죽을 년’이라고 읽어주었다. 옆에서 그 대화를 듣고 있던 아버지가 한술 더 떠서 “임자 참 딱하오. 세상에는 한 물건에 한 가지 글자가 있는데 무슨 글자는 없겠소.”라고 한다. 그런 뒤에도 아들의 공부는 별 진전이 없어서 글을 읽는다는 핑계로 세월만 보냈다. 그 후 가세는 기울어져서 아들이 생활 일선에 나서 주기를 바랐으나 아들은 글 읽는 선비의 길을 편한 것으로 오인하고 일하는 것을 싫어한 나머지 계속 글로 소일하고 있었다. 그러자 오늘도 저잣거리에 가서 나무를 팔아 식량을 사온 노부는 아들을 책망하면서 “얘야, 그 글 고만 읽어라, 내가 아무리 시장 바닥을 헤매봐야 나무 사자는 사람은 있어도 글 사자는 사람은 없더라.” 하면서 쓸데없이 글 읽는다는 핑계로 세월을 보내는 아들을 타일렀다는 내용이었다.

  그렇다. 요사이 세상에도 정신적 가치를 높이 사고 눈에 보인지 않는 보배를 중히 여기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 당장의 욕망이 문제이지 내일은 안중에도 없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제는 지나갔으니 알고, 오늘은 현실로 다가섰으니 느끼고, 내일은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지만 내일이 있다는 확신을 갖고 산다. 그런데 어떻게 현재만 족하면 되지 미래는 골치 아프게 뭘 생각하느냐고 마냥 미루는 심정이다. 인정은 옛사람이나 베풀던 도덕이요, 요즘 세태에서는 인정은 어리석은 사고라는 생각들이 팽배해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인정스러운 그 무엇의 손길에 의해서 영위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인정을 주건 받건 그것은 당연한 삶의 방식이요 길이라는 것이다.

  이 대지의 무수히 자생하는 동물들을 보라. 또 우리 자신의 삶을 보라. 모두 대지의 온정 이웃의 보살핌으로 살아가고 있다. 씨앗 한 알이 대지의 품이 아닌 들 어찌 싹을 틔워 잎을 내며 열매를 맺겠는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는 상대방의 은혜 때문에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다. 햇살의 따뜻한 보살핌이 주어지지 않았던들 이 땅 위에 생명의 역사가 이어질 수 있었겠는가.

 눈을 크게 뜨고 보면 우리들의 삶은 모두의 협력으로 모두가 베푸는 인정 덕으로 마련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 우주를 거대한 한 몸 한 생명체로 보지 않던가. 너는 나의 생존의 기반이요, 나는 너의 삶을 가능케 하는 조건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웃이 너의 형제라.’ 하고 부처님은 ‘연기(緣起)’라 하지 않았던가. 연기란 다름 아닌 관계라는 말이다.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 논리에서 나는 나를 위해서도 존재하지만 이웃을 위해서도 살고 있으며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인정을 베풀며 사는 것은 당연하고도 정당한 우리의 의무란 말이 된다.

  사는 것 자체가 바로 인정을 베풀어 주는 일이 되고 우리 인간의 삶은 곧 인정,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것이 삶의 생명의 정표가 되는 셈이다. 마음에 증오심이 있을 때 진리를, 조화를 못 느낀다.
 가뜩이나 이 나라 경제 사회 제반사가 불안한데 나라를 위해서 일하신다는 분들의 태도는 너무 한심하다. 잘, 잘못을 떠나서 진정 정의가 가슴에 용솟음친다면 내 잘못을 남에게 돌릴 수 있겠는가.

  모든 지도자는 인정 많던 선조의 후손으로서 우리의 실상을 깊이 음미해서 문명과 체면을 굳은돌로 만들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고 인정스러운 이웃에 사랑의 향기를 피워 인정이 넘치는 세상을 만들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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