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 이보다 더 신나고 행복한 일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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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 이보다 더 신나고 행복한 일 있을까”
  • 박금자기자
  • 승인 2017.08.17 14: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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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어려워 무작정 상경…공장서 일하다 사고
“죽어도 고향서 죽자”25세에 귀향 포장마차 열어
힘들 때마다 주변 도움으로 재기, 오늘에 이르러
어려운 노인과 소년소녀 가장에 도움 되고 싶어
영덕이네 해물 수산 전경

신(信)나는 사람 이야기 – ‘영덕이네’정영덕 사장

편집자주: 정영덕(48) 사장은 쉴 틈이 없다. 23년을 장사하면서 포기하고 싶었던 적도 많았지만, 뚝심으로 버티며 열심히 일하는 것 외에 달리 쉬는 방법을 모르고 살았다. 그런 그를 주변 사람들은 “항상 즐겁게 일하고 생각 또한 바르다.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 일엔 시선도 주지 않는다” 고 평한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정말 믿음이 가는 사람이었다. 장애라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평범하지만 열심히 사는 사람냄새 나는 사람, 정영덕 사장의 살아 온 이야기를 들어본다.

▲고향을 떠나다.

깨끗하게 잘 청소된 입구를 지나 아기자기한 화분들과 여물어가는 포도넝쿨 사이로 들어서자구슬땀을 흘리며 일하던 정영덕 사장(48) 내외가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첫인상에서 ‘참 다부지고 강단 있어 보인다. 두 사람은 저녁장사에 앞서 활어 선별작업이 한참이었다. 불편한 손을 단 한 번도 불편해 본적이 없는 사람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정영덕 사장은 옥천군 안내면 현리에서 아버지 정오룡과 어머니 최정림의 삼남 중 셋째로 태어났다.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읜 뒤 집안형편이 어려워 졌다. 이 때문에 고등학교를 중퇴하고바로 생활전선에 뛰어 들었다.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큰  도움이 되고 싶었다. 집을 나와 무작정 서울로 갔다. 모터공장에 취업해 금형제작 일을 시작했다. 고된 일이지만 적성에 맞아 즐겁게 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 되지도 않아 공장에 화재가 났고, 화재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해고됐다.

영덕이네 해물 수산 사장님 부부

 ▲장애를 입고 좌절했었다

한동안 무력감으로 지내던 그가 재취업한 곳은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회사였다. 무리하게 작업을 강행하다 피로가 누적됐고 결국 깜박 졸다 프레스에 사고를 당했다. 동창생인 아내(이명화. 48)를 만나 첫 아이(나래.간호사)를 막 낳았을 무렵이다. “아내와 아이가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악몽 같던 그 날은 지금도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그는 말했다.
한동안은 좌절도 많이 했다. 산재보상으로 받은 돈은 흐지부지 없어졌다. 그 때 그가 깨달은 것은 ‘노력 없이 들어오는 돈은 가치 없이 사라진다’는 거였다
그의 왼손가락 다섯 중 넷은 없다. 엄지도 접합을 통해 겨우 이어놨다고 했다. 아직도 힘들고 아프다는 말도 했다. 그렇다고 좌절하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며 ‘나만 바라보고 있는 가족이 있기에 남보다 더 노력하고 억척스러울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왼 손가락 네개가 없어도 정사장은 대형 1종 면허와 특수(트레일러)면허를 가지고 있다. 장애정도에 따른 적성검사에서 부적합판정을 받았지만 다. 면허시험장 측에 ‘할 수 있다’고 설득해 결국 합격을 받아냈다.


▲다시 시작하자

‘영덕이네’ 횟집을 시작할 당시 지역 주민과 지인들의 도움이 컸다.
손가락 사고 후, 사장의 배려로 화물차 한 대를 지원 받았다. 그동안 모은 삼백만원을 가지고 죽더라도 고향에서 죽자는 마음으로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때 나이가 스물다섯이다. 나이들어 돌아오는 일반적인 귀향에 비해 조금 이른 귀향이었다. 하나 남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이런 손으로 무얼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그래도 손가락 하나는 남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왠지 든든해서 한참을 바라보니 웃음도 나고 힘도 나더라고 했다. 그렇게 또 다시 힘을 얻어 옥천 하상주차장에 포장마차를 열었다. 지인들이 하나둘씩 찾아줬고 자연스레 ‘영덕이네’ 라는 상호도 정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물적, 심적으로 도움주신 분들 덕분에 일어설 수 있었다며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조개구이

▲또 다시 침수로 모든 걸 잃었다

영덕이네 횟집은 밤이 피크다. 술을 팔다보니 온갖 욕설과 싸움이 난무하는 날이 허다하다며 “손님이 왕이라는 생각에 힘들어 하는 아내를 위로는커녕 오히려 질책했다. 잘 견뎌준 아내가 고맙다” 고 아내에게 미안함을 드러냈다.
포장마차를 할 땐 장소가 하상도로이다 보니 비가 오면 항상 긴장을 해야 했다. 맨손으로 시작한 포장마차의 집기들이 침수에 모두 쓸려간 적도 있었다. 넋 나간 사람처럼 울부짖으며 그것들을 하나라도 건져 올리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그에게 돌아 온 것은 허탈감뿐이었다. ‘당시 트라우마로 지금도 비만 오면 무섭고 불안해서 뜬 눈으로 밤을 꼬박 새운다’ 고 말했다.
그런데 정사장의 삶을 바꿔 놓는 일이 일어난다. 하상도로가 침수될 때  물에 휩쓸려가던 다섯 살 여자아이를 구해낸 것이다. 둥둥 떠내려가는 냉장고를 올라타고 그 아이를 구조했다. 물살에 떠내려가는 그의 물건들은 뒷전이었다. 급히 병원으로 데리고 갔지만 이미 폐에 물이 차서 힘든 상황이었다. 그 아이가 살아나기를 간절히 기다려 병원에서 밤을 꼬박 새웠다. 다음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 아이가 깨어났을 때, ‘죽었던 자식이 돌아온 것 같다는 기분이 이런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지금쯤은 그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거라며 그 일로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이 곧 나의 행복이란 것’을 알았다고 했다

▲웃다보니 막혔던 일이 술술 풀렸다

그는 가끔씩 주위에서 ‘매일이 고된 노동의 연속인데 행복하냐’는 질문을 받는다고 한다.
“매일 아침 눈을 뜨고, 그 날 내가 할 일이 있고, 건강한데, 이보다 더 행복하고 신나는 일이 있을까? 힘들다고 인상 쓰고, 버겁다고 눈물 흘리면 뭐가 달라지나? 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결과가 기대치만큼 나오지 않으면, 거기서 멈추고 그냥 허허 웃는다. 그러다보면 희한하게도 의외의 성과가 나오기도 하더라”며 조급한 현대인들의 삶이 안쓰럽다고 했다.

물회

▲벌만큼 벌어… 힘든 사람 돕고 싶어

‘이제는 내려놓고 좋은 일 하며 살고 싶어요’ 정사장 내외의 생각은 같았다. 그 동안 아이들 교육비를 제외하고는 버는 대로 저축했다. 어느 정도 모아졌을 때, 연립을 사서 되팔기를 거듭해 2년전 옥천읍 삼양로 35번지. 지금의 주택과 가게가 합쳐진 건물을 매입했다. 면적은 약 596㎡(약 180평) 6억 원이 넘을 거라고 했다. 23년을 악착같이 장사한데 대한 공로상 같은 거라고 했다. 이제는 아이들도 잘 자라주어 큰아이는 간호사(나래, 건양대학병원)로 작은 아이는 치(齒)기공사(김천대재학)의 꿈을 키우고 있다.
정사장은 그 동안이 직진 인생이었다면 이제는 느림의 행복을 느껴보고 싶다고 했다. 주위도 둘러보고 도움이 필요한 분들을 위해 마음을 열 것이라고… 특히 소년소녀 가장들이나 노인을 위한 무료 식사제공을 할 계획이다. 언젠가 노인 두 분이 메뉴를 훑어보더니 가격을 묻고 또 묻다 그냥 나가셨다고 한다. 수 분 뒤 옆집 국수가게에서 국수 한 그릇을 나누어 먹는 것을 보고 물 회 한 그릇 드리지 못한 것이 후회되어 그 날 술을 많이 마셨다고 했다. 정사장은 또“요즘은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선택의 폭도 넓어졌는데, 간혹 노력해 보기도 전에 어렵고 힘들다며 포기하는 젊은 친구들을 볼 때가 있다. 그런 친구들을 볼 때면 마음이 아프다. 포기하고 싶을 만큼 힘든 사람들에게 가게의 문턱을 낮추고 한잔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힘이 되어 주고 싶다고 했다.
영덕이네 마당은 길고양이들의 쉼터이기도 하다. 가끔 밥을 챙겨주다 보니 지금은 여러 마리가 식구처럼 드나든다. 며칠 전에는 드나들던 길고양이가 제왕절개로 새끼 다섯 마리를 낳았다고 했다. 정사장 가족들은 어미고양이가 돌아 올 때까지 새끼 다섯 마리를 인공포유로 돌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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