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의 교토와 사람들
상태바
정지용의 교토와 사람들
  • 김묘순 문학평론가
  • 승인 2018.08.16 16: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묘순 문학평론가

정지용은 “냇가(압천)에서 거닐고 앉고 부질없이 돌팔매질”하고 “달도 보고 생각도 하고” 시험기간에는 “노트를 들고 나와 누워서 보기”도 하였다고 한다.(「압천 상류 상」, 『원전으로 읽는 정지용 기행산문』, 깊은샘, 2015)

정지용은 역구풀 우거진 압천에서 여수(麗水)를 만난다. 여름철이 되면 “역구풀 붉게 우거”지고 밤에는 “뜸부기 운”다는 정지용의 일전(日前)이 있었다. 그런데 하필 역구풀도 우거지지 않고 뜸부기도 울지 않는 날에 여수가 교토를 찾았던 것이다.

정지용과 함께 『요람』 동인과 구인회 활동을 하였던 여수. 그는 아마도 만주로 가기 전에 정지용과 압천에 들렀던 것 같다. 여수는 정지용에게 “역구풀 우거진 보금자리, 뜸부기 홀어멈 울음 우는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
그러나 그 시시한 질문에 어색한 대답을 회피한 정지용은 압천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였다가 광복 후 월북한 여수. 그는 정지용과 이후, 영영 만나지 못한 채 이승을 하직하였을 것이다.

정지용이 교토로 유학을 간 것은 1923년이다. 일본 국민작가로 잘 알려진 나츠메 소세키(1867-1916)도 “압천 조약돌을 밟어 헤여 다하였다”고 정지용은 말하였다. 정지용이 유학가기 7년 전에 생을 마감한 나츠메 소세키. 그러나 그도 정지용처럼 영문학을 전공하였고 영국 유학을 다녀왔으며 교사로 재직하였고 아사히 신문사에 재직하고 글쓰기를 업으로 하였다.

정지용에게서도 나츠메 소세키처럼 영문학 전공, 교토 유학, 교사, 신문사 등의 언어적 유사성과 인생 노정이 흡사함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로 유명한 나츠메 소세키. 그의 초상은 1984년 이후 1000엔 지폐에 실리기도 하였다.

정지용이 일제강점기의 지식인으로 고향 상실을 고뇌하며 타향으로 의식하였을 교토라는 도시. 봄, 가을 비오는 날 압천의 다리를 굽 높은 나막신을 신고 파란 지우산을 받고 건너는 정취를 정지용은 업신여길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17-20세기 초 에도시대에 성립된 당대 사람들의 일상생활이나 풍속화를 그렸던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廣重:1797-1858). 정지용은 당시 압천의 풍경을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풍속화 한 폭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교토를 방문한 7월의 중순, 마침 상국사승천각미술관(相國寺承天閣美術館)에서는 ‘유세화최강열전’이 2018년 7월 3일-8월 5일(전기)에 열리고 있었다. 이곳은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관람하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 미술관 앞에서 돼먹지 못한 아집으로 발길을 돌렸던 기억. 사진 촬영을 하지 못하더라도 만약 기회가 된다면 9월 30일까지 열리는 후기 전시회에 다녀오고 싶다. 가서 머리와 눈으로 기억해올 일이다.

그림으로 시를 쓰고 산천을 노래하였다는 우타가와 히로시게는 1858년 에도에 콜레라가 한창일 때 병에 걸려 이승을 떠났다고 한다. “붓을 동쪽(고향인 에도)에 남겨두고/ 새로운 여행을 떠나노라/ 서쪽(극락세계) 땅의 명소를 구경하고 싶구나.”라는 작별의 말을 남기고. ( )는 필자 주.

우타가와 히로시게에게 일상은 그림이었고 이상은 시가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정지용이 그의 작품에 우타가와 히로시게를 등장시키지는 않았을까?
그림으로 온화하고 독특한 시를 표현하였다는 우타가와 히로시게와 언어로 인간의 둔탁한 감정을 경이로운 감촉으로 어루만졌던 정지용.
이들은 시공간을 초월한 예술적 감각으로 서로를, 국가를, 우주를 이해하며 친밀도를 높여 아름다워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