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망하고 대한민국은 분연히 일어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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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망하고 대한민국은 분연히 일어설 것
  • 도복희기자
  • 승인 2018.08.16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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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유한곤 열사…모진 고문에도 독립 외쳐
막내아들 유학식 목사 5살 때 고문 후유증으로 순직

독립운동가 유한곤 열사는 경북 경산(慶山) 사람이다. 1902년 12월 7일 태어나 1962년 2월 17일 고문의 후유증으로 작고했다. 그는 1930년대 후반부터 경북 경산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일제의 탄압에 굴복한 대한기독교장로회측은 1938년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수용했고, 그 결과 대부분의 교회들은 신사참배예식을 거행해야만 했다.
그러한 가운데 경산의 평사교회· 상림교회· 봉회교회는 유한곤 열사를 비롯해 목사와 신도들이 일치단결,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라는 성경구절을 앞세우며 신사참배 강요에 적극 반대했다. 일경들은 이들 교회를 폐쇄시키기 위해 온갖 탄압을 자행했다. 그럼에도 유한곤 등이 굴복하지 않자 일제는 급기야 교회 강대상 안에 ‘조천기도회 강령’이란 제목 하에 조선독립만세· 일본타도· 영미만세· 비밀엄수 등의 글을 써놓은 뒤 이러한 문구가 교인들에 의해 씌여진 것으로 몰아붙이는 계책을 동원했다. 그것을 구실 삼아 1943년 11월 17일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교인들을 체포했다. 유한곤 열사도 이때 잡혀가 가혹한 고문을 당하며 1년간 옥고를 치른 끝에 1944년 11월 석방됐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기에 이른다.

유한곤 열사 아들 유학식 목사

△아버지와 추억조차 없는 어린시절
아버지 유한곤은 1962년 61세에 돌아가셨다. 막내 아들인 유학식(62)목사가 5살 때였다. 현재 8남매 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유 목사는 아버지에 대해 기억할 것이 별로 없다고 말했다. 그만큼 아버지와의 추억이 많지 않았다. 유 목사는 아버지를 기억할 것이 없는 현실이 안타까운 듯 고개를 숙이고 보훈처에서 받은 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건네주었다.

△1943년 끌려가다
1943년 6월18일. 그의 아버지는 일본 순사에게 끌려가 1944년 11월 11일 감옥에서 나왔다. 그때 당시 독립운동이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교회 강대상 안에 있던 원고가 일본인의 손에 발각됐는데 원고내용이 문제가 된다고 끌려가게 되었다. 이스라엘 출애굽 사건을 들어 ‘일본은 망하고 대한민국은 분연히 일어설 것’ 이라는 설교 내용의 원고가 강대상 안에서 발견되고 이로 인해 14명 교인들이 전부 끌려가게 된 것이다.

△ 어린 자식들을 맡기다
아버지가 일본인의 손에 끌려가고 어머니 혼자 농사로 아이들 생계를 책임지는 상황이 됐다. 이때 어머니는 혼자 농사를 지어 아이들을 모두 부양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눈물을 머금고 둘째를 ‘하양’ 제일 큰집으로 보냈다. 셋째는 경북 청도 사촌 집으로 보내졌다. 입 하나를 덜어야 더 어린 자식들을 살릴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안 계신 동안 혼자서 농사를 지어 남은 자식들을 먹여 살렸다.

△ 고문과 후유증
아버지 유한곤 열사의 형무소 생활은 고통의 나날이었다. 매일매일 고문을 당했고, 천황에 대한 신사참배를 강요당했다. 대나무 관절로 찔리고 고춧가루 물을 강제로 흡입시키는 것은 다반사였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아버지는 죽기 직전까지 고통 속에 살았다.

△ 고문2
유 목사가 보훈처에서 받은 아버지에 관한 자료에는 고문을 당했던 상황이 처절하게 쓰여 있었다. 그 자료에 의하면 “고문은 매일 밤 10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밤 10시는 죽으러가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날마다 주님 따라 가려는 죽는 연습을 했다. 17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고 고문을 당한 14명 중 현재 생존하는 사람은 세 사람뿐”이라며 “생존해 있는 세 명도 그때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으며 여생을 보내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 고문3
당시 “일경들은 우리들을 연무장으로 끌고 가서 무조건 구타하고, 고춧가루 물고문을 했다. 여섯 자나 되는 막대기를 등에 대고 양팔을 묶은 다음, 배 위로 의자를 엎어눌렀다. 유도복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주전자에 고춧가루 물을 붓는 고문을 반복했다. 코가 떨어져 나가는 고통은 말로 다할 수가 없다. 한 시간 정도 고문을 당하고 나면 눈이 캄캄하여 앞이 보이지 않고 몸을 가눌 수 없게 돼 감방에 내동댕이쳐졌다. 감옥 안에서는 ‘이’와 ‘빈대’가 온 몸을 물어뜯었다. 참을 수 없는 고통 이었다”고 당시 상황은 같이 끌려갔던 김종호 장로의 고백으로 알 수 있었다.

△ 불운한 시대상황
신사참배를 반대한 죄, 치안유지법 위반이란 죄목이었다.
당시 봉회교회(현 진량제일교회)는 항일 집회 사건에 연류 민족 운동가로 지목 돼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들이 검거되기 전 1942년, 왜정 말엽에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인이 피땀 흘려 지은 농사를 공출로 다 가져갔다. 고지서대로 공출을 받치지 못하면 유치장으로 끌고 가는 상황이었다. 배급은 콩깻묵과 변질된 것을 반씩 섞어서 주고, 옥수수와 수수를 주어 연명케 했다.

낮에는 산에 가서 소나무 광솔과 송진을 따고, 밤에는 가마니를 짜서 바쳐야 했다. 예배당 종과 놋그릇 등도 다 빼앗아 가서 전쟁 무기로 사용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출애굽 사건을 상기하면서 우리나라도 멀지 않은 장래에 독립이 될 것을 역설하고, 미국이 승리할 것이라는 설교 내용이 일본 경찰에게 알려져 평사, 상림, 봉회교회 장로와 집사들이 민족주의자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 아버지에 대한 기억
3대째 기독교 집안인 유학식 목사는 5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가 대한 기억을 떠올리다가 결국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많이 없습니다”라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말을 이어갔다. 생각나는 몇 가지를 조용한 목소리로 말해 줬다. “힘이 세던 아버지는 씨름선수였고, 신앙심이 투철해서 형무소 생활에서도 신앙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아버지와 손잡고 교회에 나가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떠오르고, 매일 새벽 4시30분에 나가서 교회 종을 맡아서 치던 분이었다”고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아버지에 대해 들려줬다.
막내아들인 유학식 목사는 일제말기 고문의 후유증으로 5살이 채 되기 전에 운명을 달리한 아버지와의 추억이 거의 없어 보였다. 그는 아버지에 대해 말하고 싶은 만큼 추억을 가질 수 없던 시간들을 안타까워하는 눈빛이었다.

△ ‘독립정신’이어갈 수 있어야
유 목사는 인터뷰 말미에 “독립유공자들과 그 후손들에 대한 격려와 보상은 대를 이어 이어져야 한다”며 “이것이 ‘독립’ 이라는 정신을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인데, 점차 사라지는 독립유공자 후손들에 대한 보상제도가 아쉽다”고 전했다.

▲ 어머니 故 김무연 여사와 어린 아들 유학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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