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장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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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장 난
  • 김정자 수필가·지니카페 대표
  • 승인 2019.01.31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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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자 수필가·지니카페 대표

창밖 앙상한 나뭇가지가 겨울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마치 설 명절을 앞두고 이것저것 준비하기 위해 심란한 마음처럼. 두터운 외투 주머니 사이로 시린 손을 푸욱 집어넣고 걸어가는 행인들의 발걸음도 빠르게 느껴진다.

아파트 정문 앞 찬바람을 이기기 위해 털모자를 꾹 눌러 쓰고 장작불을 지피며 ‘군고구마 사려’라고 외치는 모습도 정겹다. 가까이 가보니 고구마 통속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이 어린 시절 동네 선후배 할 것 없이 불장난하던 추억 속으로 나를 이끌었다.

다 닳아 빠진 고무신을 신고 학교에 갔다 오는 길에 발이 시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나무들을 모아서 불을 지펴 발을 녹이던 그 시절에 우리에게 겨울철 놀이 중에 불장난이 으뜸이었다. 지금의 겨울 보다 더 춥게 느껴졌던 그때 친구들 몇 명이 모이기만 하면 성냥불을 그어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시작된 놀이였다.

논에 널려진 지푸라기로 불씨를 만들고 흩어져 있는 나뭇가지를 모아 태우기도 했다. 일단 불장난이 시작되면 손에는 숯검댕이가 칠해져 있고 머리카락을 그을리면서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흐르던 친구들과 오빠 언니들이었다. 내 모습이야 어찌 됐건 그렇게 한참 동안 우리들의 놀이가 끝날 때쯤이면 온몸엔 퀘퀘한 연기 냄새가 진동했다.

언제 그랬는지 옷 몇 군데는 불덩이가 튀어 구멍이 나 있고 그때서야 엄마한테 혼날 생각에 걱정이 되기도 했다. 남자들은 한군데 모여 바지를 내리고 오줌으로 불을 끄면 호기심 많은 여자들은 수줍어서 옆눈질로 보면서 얼레리 꼴레리를 하면서 놀리기도 했다.

그러면 남자들은 오줌에 타다 남은 나뭇가지로 얼굴에 먹칠을 하곤 했다. 지금은 그런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돌아 갈 수 없는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얼마 전 동창회를 끝내고 친구들과 불장난 하며 놀던 곳으로 갔다. 휑한 들판은 겨울 찬바람만이 우리를 반겨주었지만 다행이 아직도 고향을 지키고 있는 동창이 있기에 찾아갔다.

바쁘게 일을 하면서 반갑게 맞이해 주고 춥다고 불을 지펴 주었다. 삥 둘러앉아 있는 얼굴들은 타오르는 불꽃에 붉게 달아올랐다. 그때는 숯덩이로 까맣게 칠해져 있어도 너무나 예뻤던 친구들이 검은 주름살로 그동안 살아온 삶을 말해주었다.

이제는 모두 중년의 아줌마들이 되었지만 순수했던 어린 시절 거침없이 뛰어다니며 함께해 왔기에 잠시 같이 있던 추억 속에 빠져들 수 있었다. 언제 묻어 놓았는지 친구는 장작불 속에 잘 구워진 고구마를 꺼냈다.

노랗게 익은 뜨거운 군고구마 맛은 우리들에게 또 다른 추억의 힘을 주었다. 한참 수다를 떨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자정이 지났다. 우리가 철없던 시절에는 정말 불장난으로 시작했지만, 사랑의 불장난을 한번 해보자고 하면서 역시 불장난은 영원한 우리들의 놀이라고 떠들어 대며 한참을 웃었다.

가끔 속절없이 지나는 시간 속에 마음을 묶어 보지만 세월 앞에 장사 없듯이 점점 주름살이 늘어만 간다. 이제 며칠 후면 설 명절이 돌아오고 또 한 살이 주어진다. 다들 어렵고 힘들다고 여기저기서 한숨소리가 크다. 이번 성 멸절에는 고향의 추억들을 가득 담아서 한숨 소리보다 웃음소리가 더 컸으면 좋겠다.

어려울수록 조금씩 욕심을 비우고 마음의 샘 속에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처럼 따뜻한 부모 형제 친구들과 즐거운 명절을 보내길 바란다.

타오르던 불꽃이 사위어 가고 뿌연 연기처럼 사라진다 해도 검은 숯덩이는 또다시 불을 지필 수 있듯이 각자의 자리에 돌아가도 언제든 만날 수 있는 그런 관계가 되길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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