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만세운동(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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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만세운동(3)
  • 전순표 시인·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 승인 2019.03.14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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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만세운동-
전순표 시인·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청산만세운동은 3월 26일 청산읍내서 수백 명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작되었다.
4월 2일~4일까지 3일간 청산만세운동은 주재소를 파괴하며 헌병대의 발포로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는 등 청산 만세운동은 연인원 3천명이 참가한 충북에서 가장 격렬한 만세운동이다.  
고종 장례식에 다녀 온 박재호 지사는 백운리 마을에서 26일 마을의 안병하, 박동희, 고한주, 김복만, 신업이, 김홍 등과 함께 모여 4월 2일 청산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박재호 지사는 손수 만든 태극기 300장을 배포하였다.
4월 2일 장날 점심때부터 청산장터에서 보통학교 학생, 면민, 장꾼들까지 합세한 군중 300명을 박동희, 안소석, 김철수 지사가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이끌었다.
이날 밤늦게까지 만세군중들은 청산읍내를 돌아다니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자정을 넘기며 3일 새벽 1시경에야 시위 군중이 해산했다.

▶충북서 가장 격렬했던 청산 만세운동 청산장터

특히 4월 3일 저녁 8시 보청천 뚝방에서 만세운동을 펼치며 청산장터로 이동하니, 군중이 수천 명으로 불어났다. 격렬해진 군중들이 청산주재소를 습격하니, 지원 온 영동헌병대의 무차별 발포로 5명이 즉사하고 50~60명이 부상당했다.
특히 예곡리 김철수 의사는 “공포탄이다. 두려워 마라” 하며 선봉에 서서 헌병대를 향하여 돌격하다, 다리에 총탄을 맞았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전진하다 체포되어 잔혹한 고문으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예곡리 김인수 지사도 현장에서 붙잡혀 혹독한 고문으로 그날 순국했다.
또 박동희 지사는 맨주먹으로 일본헌병에 대항하다 체포되어 감옥에서 모진 고문으로 23세에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4일 새벽 1시까지 계속된 청산면과 인접한 보은, 영동, 상주 장꾼들까지 합세한 수천 명이 대규모의 청산만세운동은 이원만세운동과 함께 주재소를 파괴하고 점거했다. 더욱이 일본 헌병대의 발포에 목숨을 내놓고 붉은 피가 낭자한 가운데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청산만세운동은 많은 사상자를 낸 충북에서 가장 격렬한 3.1만세운동이었다. 이후 청산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많은 애국지사들이 체포되어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다가 순국하거나, 옥살이를 하였고 또 태형을 받았다.

▶청산만세운동, 총독부 충북도장관 보고서

청산만세운동과 관련 미수훈된 애국지사는 호적이 없거나, 후손을 찾지 못하는 원인 등으로 안소석, 손일만, 안대봉, 최남석, 신업이 지사는 정부로 부터 아직 서훈을 받지 못했고 박동희 선생은 작년에 서훈을 받았다. 그래서 옥천군은 올해 안소석, 손일만 지사의 청산만세운동 공적서과 관련 미비한 증빙서류를 국가 보훈처에 제출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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